병협 회장선거 의미와 전망

병협 회장선거 의미와 전망

  • 송성철 기자 songster@kma.org
  • 승인 2000.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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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대 대한병원협회장에 라석찬(羅錫燦, 65) 부회장이 선출됨으로써 병원계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일 전망이다.

단독 출마에 만장일치 찬성으로 추대 형식을 갖췄던 역대 병협 선거와는 달리 이번 병협 회장 선거는 총회 당일까지 경선 구도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병협의 진로에 새로운 구도가 예견된다.
 
병협 회장 선거는 총회에서 전형위원을 구성, 회장 후보자를 추대하고, 이를 총회에서 인준 받는 간선제 형식. 이번 병협 회장 선거의 초반 분위기는 관례대로 노관택 회장이 중임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의협과 달리 병협은 회장 임기가 2년으로 되어 있다. 발전방향을 구상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역대 병협 회장은 중임내지 3번 연임했다.

이번 총회에서도 관례에 따라 29대 노관택 회장이 한 번 더 회장을 맡아야 한다는 모범답안이 벌써부터 제출된 상황이었다. 노 회장은 98년 병협 회장에 취임하면서부터 전임 한두진 회장 재임시 일어났던 9억여원의 경리사고 문제를 떠 안아야 했다.

병협 전체 재정의 약 1/3에 달하는 막대한 적자 재정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한국병원경영연구원 출범, 자동차보험 진료수가 분쟁심의회 참여, 병원관리종합학술대회 개최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노관택 집행부는 내부 문제를 수습하는 한편 의약분업과 의료보험 제도 등 일대 변혁의 물꼬에 매달려야 했다. 병협 출범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에 회장을 맡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노 회장 자신은 이를 회원 병원에 적극적으로 알리거나 홍보하는 일에는 미온적이었다.

노 회장 취임 이후 의료계에 불어닥친 변화와 개혁의 물결은 경리사고 후유증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파장을 몰고 왔다. 문제는 변화와 개혁의 물결이 병원계의 역량으로 물꼬를 틀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중소병원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위기의식은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과 함께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는 것으로 비춰진 노관택 집행부에 대해서도 불만으로 작용했다.

이런 불만이 이번 선거에 직접 표출됐다고 할 수 있다. 13명으로 구성된 전형위원회는 전형위원 선임 과정에서부터 팽팽한 신경전이 오갔으나 이미 분위기는 라 부회장으로 기운 상태였다. 전형위원회에서 대세가 기울자 노 회장은 사의를 표명, 라 부회장을 총회에 단독 후보로 추대하도록 모양새를 갖췄다. 외형상 추대 형식을 갖췄다고는 하지만 병협 사상 유례가 없는 경선 구도였다는 점에서 병협 내부의 변화에 대한 요구가 얼마나 거셌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종합요양기관 대 중소병원의 대결 구도가 본격적으로 표출됐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중소병원 그룹의 리더인 라 이사장이 종합요양기관의 대표자격인 노 회장의 중임 구도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의 화두는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회장을 선출, 정부당국의 의료정책에 강력히 대응을 해야 한다는 위기론과 자성론에 맞춰져 있다. 정부의 의료정책으로 인한 병원계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선거를 통해 표출된 것이다.

그동안 중소병원은 병협 회무가 종합요양기관 위주로 펼쳐진다며 적지 않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런 불만은 정부의 병원 고사(枯死) 정책에 이렇다할 반격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피해 의식에서 비롯된다.

최근 2년 사이에 추진된 의료정책은 의료계에 적지 않은 희생과 고통을 요구했다. 특히 의약품 실거래가 제도, 입원료 단입제, 진료비 카드 수납 전면 확대, 자보수가 전격 인하, 지정진료제의 선택진료제 변환 등의 의료정책은 병원계를 고사시키는 정책으로 각인 됐다. 의약분업 제도를 입안하는 과정에서 직능분업을 주장해 온 병협과 기관분업을 추진한 의원과의 입장차이는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다.

라 부회장이 병협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경선 구도의 부담을 안고 회장 선거에 나서게 된 것은 "이대로는 안된다"는 상당수 병원장들의 변화에 대한 요구가 뒷받침 됐기에 가능했다.
 
노관택 집행부를 보좌해 온 수석부회장이라는 어려운 입장에서 출마를 선언한 라 부회장은 "임원의 한 사람으로서 일련의 병원관련 정책 실기(失機)에 책임감을 통감하지만, 부회장으로서는 여러 현안에 대처하거나 앞장서서 일을 추진하는데 구조적인 한계가 있었다.

미력하나마 그간의 회무경험과 병원 경영자의 입장에서 병원계 전체의 권익을 위한 십자가를 지고자 한다"며 출마를 결심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음을 토로했다. 라 부회장은 "우리 주변의 사회가 새 천년의 시대를 맞아 가슴 부풀어 있는 시기에 우리는 장래를 걱정하며 어떻게 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전전긍긍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며 병원계의 억울한 상황도 덧붙였다.

라 부회장의 회장 당선은 먼저 노관택 집행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불만을 가진 상당수 회원 병원장들의 열망이 반영됐다는 점에서 강성 집행부 구성이 전망되고 있다. 집행부 재편의 파장도 "새로운 진용으로 조직을 재편하여 분위기를 일신하고, 새로운 전략으로 현안 타개에 나서겠다"는 라 회장 당선자의 선언처럼 중폭 이상이 될 것으로 예고된 바 있다.

라 회장 당선자는 "병원계의 도산위기를 막기 위해 대 정부활동을 강화하고 때에 따라 투쟁도 하겠다"며 지금까지의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대안 제시와 함께 투쟁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

새롭게 구성될 36명 이사진의 성향도 이런 기조에 맞춰 재편될 것으로 전망된다. 라 회장 당선자는 부회장단과 이사에게 상당한 권한을 위임, 자율적인 회무를 토대로 강력한 집행부를 구성한다는 복안도 세워놓고 있다.
 
의료정책에 있어 병원계가 추진 가능한 사업은 일단 시범사업이 꼽히고 있다. 시범사업 카드는 시범사업 절대불가를 내세운 보건당국에 대해 병원계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할 수 있고, 향후 의약분업 추진 과정에서 병원계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선택될 가능성이 높다.

이와 함께 병원 외래 환자의 처방전 문제와 의약품 실거래가 제도도 환자의 선택권을 제한하고, 자유시장 경제의 논리에 위배된다는 법적인 접근을 통해 개선안을 도출해 낼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자칫 의료계의 내부 분열 문제가 불거질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라석찬 집행부의 행보에 적지 않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의료계의 분열 문제를 비켜가면서, 병원계의 입장을 최대한 대변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의협과 병협의 잇따른 세대교체 이후 의료정책을 둘러싸고 일어날 수 있는 입장 차이가 자칫 의료계 분열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양 집행부가 충분한 협의와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료계를 하나로 결속시킴으로써 보다 강력한 윈_윈 전략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지배적이다. 양 집행부의 긴밀한 대화와 신뢰 형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 지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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