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몇 년 사이 보험사가 환자를 대위해 의료기관에게 잘못 지급된 보험금의 반환을 청구하는 소송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채권자 대위권 행사 가능 여부에 대해 대법원은 2022년 8월 25일 기존 법리를 인용하며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번에 판결이 선고된 사건은 트리암시놀른을 비염치료에 사용하는 것이 소위 '임의비급여'에 해당하는데 그에 대해 실손 보험금이 잘못 지급되었다는 취지로 보험사가 의사를 상대로 채권자대위권을 행사했던 건이다(이하 '트리암시놀른 사건').
대전지방법원은 1심과 2심에서 임의비급여 진료행위를 하고 진료비를 받은 행위를 위법하다고 전제한 후, 환자도 의료기관에 진료비 반환청구를 할 수 있으니 보험사가 환자의 권리를 대신(대위)해 의료기관에 반환청구를 할 수 있다고 판단(의사 패소)했다. 그리고 이 사건 피고 의사는 2019년 대법원에 상고했고, 이번에 그에 대한 선고가 이뤄진 것이다.
보험사들은 위 트리암시놀른 사건 1, 2심 승소 이후 본격적으로 소위 '임의비급여'에 해당한다고 생각되는 진료에 대해 지급했던 보험금들을 조사해 맘모톰은 물론, 페인스크램블러, 한방의 산삼약침 등 다양한 진료과목의 여러 행위들에 대해 의료기관이 받은 진료비를 반환하라는 취지의 채권자대위소송을 우후죽순 제기하기 시작했다.
설사 보험사가 환자들에게 보험금을 잘못 지급했다 하더라도 보험사와 환자 간 보험금을 반환받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환자를 건너뛰어 의료기관에게 반환청구를 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는 채권법상 중요한 쟁점이다.
채권자 대위권은 쉽게 말해 남의 권리를 대신 행사하는 권한이다. 이 사안에서 보험사는 자신이 환자에게 반환받을 보험금이 있고(채권 A), 환자가 의사에게 반환받을 진료비(채권 B)가 있으니 보험사가 환자의 권리(채권 B)를 대신 행사해서 의사로부터 직접 해당 금원을 받아오겠다는 취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동안 대법원은 채권 중간에 낀 채무자가 무자력, 즉 갚을 능력이 없거나, 자력이 있어도 두 채권이 밀접하게 관련돼 있고 채무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반하지 않을 경우에 한해 채권자 대위권 행사가 가능하다고 일관해 판시해 왔다.
트리암시놀른에 대한 1, 2심 사건에서는 이와 같이 보험사, 환자, 의사 간 채권자 대위권 행사 요건 충족 여부에 대해 상세히 다뤄지지 못했기 때문에 의사가 연달아 패소했지만, 후속 사건들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됐다.
일단, 보험사는 얼마든지 고객인 환자들에게 '보험금이 잘못 지급되었으니 돌려달라'는 요청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보험사의 주장대로 의료기관의 진료가 임의비급여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환자가 원해서 진료를 받은 경우 환자가 반드시 의료기관에게 진료비의 반환청구를 한다는 보장이 없다. 진료를 원하고 만족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험사는 환자의 의사를 넘겨짚고 곧바로 의료기관에 소제기를 한 것이다. 심지어 환자들이 자신의 진료를 대상으로 이러한 소송이 이뤄지고 있는지 여부를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즉, 보험사는 환자들이 무자력인지 여부도 알아보지 않고, 자칫 잘못하면 환자들의 의사에 반할 수도 있는 소송을 남발한 셈이었다.
법원은 보험사 측에 왜 계약상대방인 환자에게 반환청구를 하지 않는지 의문을 제기했으나 보험사는 '고객들에게 소제기를 할 경우 금융감독원의 감독 또는 제재를 받기 때문'이라는 다소 엉뚱한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결국,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19년 위 트리암시놀른 판결과 달리 페인스크램블러와 맘모톰 관련 사건에서 보험사의 채권자 대위권 행사는 부적법하다는 각하판결(1심)을 했고, 이후 일부 재판부를 제외하고는 전국의 1, 2심 재판부에서 보험사의 채권자 대위권 행사는 부적법하다는 판결을 이어갔다.
그런데도 보험사는 위 트리암시놀른 사건이 대법원에 계속 중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소송을 계속해서 제기하며 위 트리암시놀른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판결할 때까지 1심과 2심의 소송 진행을 멈추어 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재판부는 재판을 진행했고 보험사는 맘모톰, 페인스크램블러, 산삼약침 사건들에서 패소한 이후 대법원에 상고를 제기했다.
이렇게 채권자 대위권 행사 가부에 대한 상반된 사건이 대법원에 모이자 대법원은 2022년 3월 17일 공개변론을 열어 위 트리암시놀른 사건과 채권자 대위권 행사가 부적법하다고 인정된 맘모톰 사건 두 개를 심리했다.
대법원은 모든 사건에 대해 변론을 열지 않고, 특히 논쟁적이거나 사회적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 사건을 선별해 1달에 1회 변론을 진행한다.
대법원이 심리하고자 한 쟁점은 첫째, 채권자 대위권 행사 시 요건을 완화할 것인지 여부, 둘째, 맘모톰 시술이 임의비급여 진료행위로서 허용되는지(진료계약이 무효인지) 여부였다.
공개변론에서도 보험사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 하며 채권자 대위권의 행사가 허용되지 않으면 보험사의 막대한 손실을 쉽게 보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취지의 변론을 했다.
채권자 대위권 행사 요건을 완화할지 여부에 대해 대법원의 해석을 변경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각 완화와 유지 견해를 대변하는 법학자들의 의견 진술도 이뤄졌다.
공개변론 이후 대법원 담당 재판부는 논의를 거쳐 2022년 5월 9일 전원합의기일 심리를 지정했다.
전원합의기일은 담당 재판부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거나 기존 대법원 판례를 변경하고자 할 때 대법관 전부가 모여 논의를 하는 절차이다.
즉, 대법원은 위 트리암시놀른 사건과 맘모톰 사건에 대해 기존 판례를 변경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내비친 것이다.
또 이 사건의 주심 재판관이 2022년 9월 퇴임을 앞두고 있어 그 전에 이 사건에 대한 결정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됐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대법원은 2022년 8월 25일 위 채권자 대위권 관련 사건들 중 트리암시놀른 건에 대해 판결을 선고했다.
이번 판결에서 대법원은 채권자 대위권 행사를 위해 채무자의 무자력 또는 채권자대위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채권 만족이 어렵다는 등의 적극적 요건이 필요하고 채권자 대위권 행사가 채무자의 자유로운 재산관리행위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 된다는 사정이 없어야 한다는 기존 판례 법리를 그대로 유지했다.
또 이 사건과 같이 환자가 무자력도 아니어서 직접 환자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임에도 직접 의사에게 반환청구를 한다면 아무 관계 없는 제3자에게 직접청구권을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점, 환자에 대한 채권자가 보험사 외에도 있을 수 있는데 사실상 보험사에게 일반채권자에 우선하는 담보권을 부여하는 셈이 될 수 있다는 점, 환자가 의사에게 진료비의 반환을 청구할지 여부는 환자의 의사에 달려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채권자 대위권 행사가 부적법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기존 1, 2심 판례를 파기하고 직접 이 사건 소를 각하하며 소송비용은 보험사 측이 부담하도록 하는 판결을 선고했다.
그러나 13명의 대법관 중 5명은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반대의견은 그 동안 대법원이 채권자 대위권 행사를 허용하는 범위를 확대해 왔다는 점, 보험사의 채권과 환자의 채권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점, 환자들도 보험사와 의료기관 간 직접 반환절차를 진행해 자신들은 분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할 수도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그 동안 보험사의 채권자 대위권 행사가 부당하다는 점을 지적한 기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며, 채권법상의 원칙에 따른 것으로 타당하다.
만약 채권자 대위권의 요건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판결이 선고됐다면, 이 사건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다른 사건들에서도 남의 권리를 대신 청구하는 것이 쉬워지는 셈이어서 소제기가 남발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보험사의 사적인 업무 편의보다는 채권법의 원칙으로 돌아가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맘모톰 행위와 관련해 보험사가 패소한 채권자 대위권 소송들에 대한 대법원 선고 기일도 잇달아 예정되어 있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 비춰볼 때 동일한 쟁점의 사건들에서도 연달아 동일한 판단이 내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각자의 채권과 채무 범위에 따라 책임을 지고 사기업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재판이라는 절차를 남용하는 상황이 종료되기를 기원한다.
다만,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는 임의비급여 행위에 대한 진료계약이 민법상 무효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은 보류했다.
기존 대법원 판결에서는 임의비급여 진료행위를 하고 환자로부터 비용을 징수하기 위해서는 예외적 요건을 갖춰야 한다고 했을 뿐, 의사와 환자 간 진료계약의 유무효 여부에 대해서 정면으로 다룬바 없다. 향후 이 부분에 대해 보다 명확한 대법원의 판단이 이뤄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