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로 27번 길에 우리 동네 최고령 노파가 사는데요 백세가 지나고부터는 도무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어요 하루종일 박스를 주워 쌀도 사고 약도 사고 가끔 박카스도 한 병씩 마신다는데요 다짜고짜 진료실 문을 열고 엉덩이를 까발리고는 돌팔이 소리 듣기 싫으면 더 센 진통제를 놓으라고 호통치는데 등골이 서늘했다니까요 기습 한파가 몰아닥친 날 귀신 같은 몰골로 나타났을 땐 지레 겁을 먹고 큰 병원으로 등을 떠밀었어요 다음날 멀쩡해진 노파 말인즉슨 효자 아들이 끓여 준 팥죽 한 그릇 먹고 불끈 힘이 솟았다는데요 며칠 후에는 방송국 카메라까지 대동하고 깜짝 방문했어요 <리얼스토리, 눈>에 '폐지 줍는 백세 할머니'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거예요 나는 카메라 앞에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말을 수습하느라 또 진땀을 흘렸어요 오늘도 노파는 귀신과 대화하듯 제 말만 쏟아내고 사라져 버렸지요 온종일 귀신처럼 귀신을 따라다니던 카메라마저 백세 이후를 찍을 수 없어 포기했다지요 백세치고는 너무 팔팔하여 호적을 확인하느라 아직 전파를 타지는 못했는데요 백세 이후는 저승사자도 셈하지 못한다는데요 슬며시 다가온 노파가 귓속말을 하는 거예요 내 나이는 나도 몰라 아직도 두 팔에 땀이 나는 다한증 소녀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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