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정원, 여론조사 방식 위험...전문가·이해당사자 합의 통해 해결법 모색해야
보완하지 않고 정책 강행 시 필수영역 공백 악화...'한국의료' 허물어질수도
정부가 발표한 의대 정원 확대 계획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병원을 떠나면서 진료 현장은 혼란에 빠져 있다. 이 상황은 단기간에 마무리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가장 큰 쟁점으로 부상한 의대 정원에 대한 정부와 의료계의 입장 차는 쉽게 좁혀질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정부는 적어도 2,000명 이상의 증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근거자료로 제시한 3가지의 연구보고서가 객관적 자료에 기반하지 않고, 연구자의 추정만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가 제시한 350명 증원안도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가장 과학적인 접근은 두 주장을 현장에서 비교 평가하는 무작위 배정연구를 진행하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차선책으로 추론의 근거자료인 다른 나라의 선례를 비교 평가할 수 있다.
인구당 의사 수가 우리나라보다 현저히 많은 대표적인 국가는 쿠바이다. OECD 국가 중 그리스, 포르투갈은 우리나라보다 의사 수가 2배 이상 많으나, 이 나라들의 의료서비스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낙후되어 있다. 의사 수가 많을수록 더 나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것이라는 추론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문의를 만나기 위해 수개월을 기다려야하는 유럽 선진국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라마다 다른 의료제도를 고려하지 않은 단순 의사 수 비교는 무의미하다.
이같이 쉽게 비교평가 연구를 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해답을 여론조사로 찾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다른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문제는 해당 분야 전문가와 이해당사자들이 모여 합의를 이루는 방식으로 해결법을 모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한적이지만 현재 참고할 수 있는 근거자료에 바탕을 두고, 환자나 국민 관점에서 무엇이 최선인지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 나가는 접근이다.
필수의료와 지역의료를 살려야 한다는 취지에는 쟁점이 없다.
정부는 의대 입학정원을 대폭 늘리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지역입학 정원제에 기반한 의사 수를 증가시켜 문제 해결을 시도했던 일본도 아직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군병원의 의료인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관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의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군 의대 위탁교육을 수십 년간 시행해 왔다. 매년 20명씩 의사가 되었는데, 졸업생 100명을 조사한 결과 군대가 필요로 하는 외과나 응급의학과를 전공으로 선택한 의사는 각 1명이었고, 대부분 의무복무 연한만 채우고 전역하였다.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하여 의무복무기간을 연장하는 입법이 시도되었으나, 직업 선택 침해 등 위헌적 요소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무산된 바 있다.
평생 종사할 전공과목으로 필수의료를 기피하는 주된 이유는 중증 환자 진료에는 환자가 악화할 수 있다는 불확실성이 항상 존재하는데, 일단 사망하거나 중증 후유증이 발생하면 담당 의료진이 형사 처벌될 수 있는 제도적 위험이다. 이 문제를 잘 관리하는 선진국과 비교하여, 우리 의료제도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정책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중증 환자 진료에 따르는 의료사고 형사처벌 부담 완화 등을 선진국수준으로 개선하는 구체적인 노력을 보여, 정부와 의료계 사이의 신뢰를 쌓아가면서 의대 정원 문제를 추진하려고 했더라면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갈등이 고조되면서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증가하면 그 결과는 궁극적으로 국민의 손해로 돌아간다. 의료현장에서 환자들은 의료진을 믿지 못하고 의료쇼핑을 계속할 것이고, 의료진은 제도적으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방어 진료를 강화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의료자원의 낭비에 그치지 않고, 신뢰하기 어려운 의사에게 자기 몸을 맡겨야 하는 환자의 불행으로 이어질 것이다.
당장 의대 정원을 확대한다고 해도 입학한 학생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10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동안, 제대로 보완되지 않은 정책의 강행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필수의료 분야에서 묵묵히 일해왔던 의료진들이 자리를 떠나게 된다면, 필수영역의 의료공백은 더 악화할 것이다.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 수십 년간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한국 의료는 적은 비용으로 높은 접근성을 가지는 제도로 발전해 왔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한국 의료 나름의 장점이 분명히 있다. 어렵게 구축한 한국 의료의 틀이 준비되지 않은 정책추진으로 허물어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합리적이고 원만한 합의안의 도출을 통하여 이 사태가 조속히 마무리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