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지역사회·커뮤니티 기반 대화·소통 체계 구축 필요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 비대위 25일 토론회…변혁 계기
의대정원 증원 강행 저지 과정에서 불거진 환자·의사 간 라뽀 손상이라는 치명적인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학과 커뮤니티 기반의 대화와 소통체계를 구축하고, 의학과 사회과학의 접점을 마련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왔다.
최재정 차의과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의료인문학교실)는 25일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대학의 역할, 의학 교육의 역할' 주제 발표를 통해 "의사는 환자와 면대면 대화 속에 라뽀를 형성하고, 신뢰를 쌓아가는 직종임에도 국민으로부터 불신·분노·실망 등 감정적인 표출 속에 집단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면서 "의사 직군에 대한 집단적 괴롭힘의 양상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근거 없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최재정 교수는 "의료계가 사회과학을 통해 전문성을 갖추고 정책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장기적으로 현실성 있는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역량을 키워야 사회 권력과 당당하게 대결할 수 있다"면서 사회과학에 관한 관심과 전문성 확보에 무게를 실었다.
지역사회에 기반한 공동체 리더로서의 역할과 사회적 책무성도 강조했다.
최재정 교수는 "지역사회 의료와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나가야 한다. 공동체 리더 역할도 같이 해야 한다"면서 "사회에 참여하고 기여하면서 리더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 안에서 발판을 마련해야 의사들을 쉽게 내치지 못한다"고 조언했다.
"환자 중심주의와 환자 안전을 최고의 가치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며 국민과의 소통과 대화에 나설 것도 주문했다.
의과대학 교육의 변화도 촉구했다.
"앞으로 자라날 젊은 의사 세대들에게 더 이상 이런 위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 최재정 교수는 "의학교육은 반성적인 실천을 강화하기 위해 윤리교육을 확대하고, 현재 하고 있는 교육을 원래 취지에 맞게 충실하게 하되 특히 의료인문학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5∼10년 안에 상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바꿀 AI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에도 무게를 실었다.
휴학 중인 학생들에게는 "현재 사태에 너무 집중하지 말고, 20∼30년 뒤를 준비하면서 플랜B, 플랜C까지 세워보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신찬수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 이사장은 '의학교육 2024 우리가 준비해야 될 미래의 교육' 주제발표를 통해 의대정원 증원에 대비해야 하는 현실적인 고충을 털어놨다.
"과거에는 대형 강의실 하나만 있으면 됐지만 이제는 여러 개의 소그룹 토의실과 컴퓨터 기반의 멀티미디어실을 갖춰야 한다. 과거보다 많은 교육자가 필요하고 비용도 더 많이 드는 구조로 교육환경이 바뀌었다"고 밝힌 신찬수 이사장은 "학생 수가 늘어나면 곱하기 2가 아니라 4내지 8을 해야 한다"며 "정원이 대거 늘어나면 당연히 교육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신찬수 이사장은 "2022년 현재 정원 50명 미만인 17개 대학 중 기초의학 8개 기본교과목(해부학 생리학 미생물학 기생충학 병리학 생화학 약리학 예방의학) 교수를 확보한 곳이 24%(4개), 50∼99명 규모인 12개 대학 중 42%(5개)로 발등에 큰 불이 떨어졌다"며 "국립대학이라도 시설 투자 외에 등록금만으로 운영해야 하는 열악한 상태다. 의학교육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정부의 대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기초 교수 부족의 대안으로 해부학은 A대학, 약리학은 B대학, 생리학은 C대학에서 듣게 하는 소위 무크 방식의 교육을 도입한다는 보도와 관련해 신 이사장은 "1952년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에 설치한 전시 연합대학에서 이런 교육을 한 적이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다시 생기리라 상상한 적이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신찬수 이사장은 "대한민국 의료와 의학교육 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전국 40개 의과대학 학장과 교육을 담당한 교수들이 교육의 질 향상을 통해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한 결과"라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의학교육과 의료인 양성을 위해서는 의학교육에 국가의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고, 사회적 책무성에 더해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보람을 갖고 일할 수 있는 환경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강윤식 경상국립대학교 의과대학장은 '직업 양성소가 된 대학-몰락하는 대학 시대 속에서 의과대학의 도전과 비전'을 주제로 열린 패널토론을 통해 "지역에 투자해서 지역의료가 완결적인 형태로 살아남는 게 안 되면 한국사회 전체가 제대로 생존할 수 없다"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지역이 그냥 따라가는 형태의 방식은 한계점에 다다랐다. 의료를 어떻게 분권화 하고, 지속 가능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길게 보면 희망을 갖고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으면 꼭 이번 사태가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는 마음으로 견디고 있다"는 강윤식 학장은 "상처가 크지만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변혁을 위한 계기가 될수도 있다. 싸움뿐만 아니라 협상과 타협, 위협뿐만 아니라 설득을 동원하여 지속가능한 현실을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