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의료의 좌절과 희망

대한민국 의료의 좌절과 희망

  • 안준호 울산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smpark0602@gmail.com
  • 승인 2025.03.06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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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신문
안준호 교수ⓒ의협신문

답답하고 힘 빠지는 작년 한 해였다.

의사로 일하면서 의업의 중요성과 자부심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제도와 환경이 나빠져도 꿋꿋이 진료했다. 2000년에 의약분업 사태로 파업할 때도, 2020년 공공의대 사태로 전공의가 나갔을 때도, 현실을 돌아보며 분개해도 기운이 빠지진 않았다.

이번엔 차원이 달랐다. 갑자기 의대 정원 2천 명 증원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그 결과를 검토나 했나? 당장 교육이 가능한가? 

돌아보니 정권 초반부터 심상찮은 조짐은 있었다.

2022년에 부산 엑스포를 유치한다며 400억원 이상 혈세를 쓰고 대기업 총수들을 동원하더니 사우디와 큰 격차로 1차 투표에서 탈락했다. 기초 정보력도 없이 과욕을 부렸다가 나가떨어졌다. 그때만 해도 정치 초보 대통령이 얼마나 민망할까 생각하면서 느낌이 싸했다. 

2023년에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과학기술계를 카르텔이라 비난하고 다음해 R&D 예산을 대폭 삭감해 버렸다. 이후 연구 중단과 연구원 실직 사태가 이어지자, 다시 예산을 늘렸지만 이미 기존 연구는 큰 타격을 받은 뒤였다. 정부는 구조조정 덕분에 2025년 예산을 증액할 수 있었다고 강변하였다. 

이쯤에서 알아봐야 했다. 준비도 대책도 없이 일단 뻥 지르기, 전문가 집단을 카르텔로 몰고 악마화하기, 처음에 대중이 호응하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우쭐하기, 나중에 문제가 드러나도 무조건 정부가 옳다고 우기기. 쉽게 말하면 무모하게 뻥 지르고 똥고집 부리고는 뻔뻔하게 우긴다. 그 '뻥똥뻔'의 끝판왕이 의대 증원이었다.

미래 의료를 위해서 최소한 2천 명 증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갑작스러운 65% 의대 증원은 세계에 유례가 없어서 일반 상식에 어긋나고, 정부가 근거로 내세운 학술적 연구는 정책 결정과 무관하거나 조건부 가설에 불과하다. (만일 독자 중에 2천명 증원이 옳다고 믿거나, 혹시라도 괜찮을지 모르니 일단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분이 있다면 여기서 읽기를 멈추기 바란다. 거짓 여부에 대한 논의는 글의 주제를 벗어난다.) 

나는 거짓 주장이 어떻게 사람들을 홀리고, 정부가 1년 동안 고집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는지에 관심 있다.

책 '진실의 흑역사: 인간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톰 필립스 저, 윌북, 2020)에 거짓이 득세하는 이유 중 하나로 '정보 공백'을 든다. 10여 년 미래에 우리나라 의료에 생길 일은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물론 가능한 정보와 지혜를 모아서 예측해 볼 수 있지만, 변수가 워낙 다양해서(인구 감소, 의료 제도 변화, 타 산업과의 관계, AI 등 과학의 발달...) 예단할 수 없다. 

제대로 된 학자라면 조심스럽게 자신이 고른 변수와 그에 따른 의견을 제시할 뿐, 미래가 이럴 거라고 확신에 차서 주장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의 미래 예측은 검토와 논의의 영역이지, 과학적 증거로 시비를 가릴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어떤 관변 학자는 미래 위험이 확실하다며 과격한 정책을 옹호하고, 과학이 뭔지 모르는 대통령은 의료계가 일치된 과학적 방안을 제시하면 대화하겠다고 한다.

증원 발표 후에 의사들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대통령이 먼저 나서서 선을 긋고, 대화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즉, 의료계와도, 정부 내부에서도 아무 논의 없이 증원이 결정되었고(회의록이 없거나 파기되었으니), 이후 논의를 거부했다. 

정부는 대화는 열려 있지만 2천 명 증원은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의료계가 정원 조정을 요구하면 정부는 매번 이미 늦었다고만 주장한다. 증원된 정원을 지방의대에 이미 배정했다, 대학입시 요강이 이미 발표되었다, 수시 접수가 마감되었다, 정시 결과가 나왔다는 둥. 

이제 2025년에 3000명에서 7500명으로 훌쩍 늘어난 의예과 1학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정부는 눈앞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고 고집부린다. 무책임한 정권이다.

작년에 거의 모든 의대생이 휴학하고, 전공의들이 사직하였다. 자신의 미래가 불확실하고 의료가 망할 위기 상황에서 합리적 결정이었다. 대학병원의 교수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의대생과 전공의의 피해를 줄이고 우리 의료를 살릴 수 있을까.

의료 문제를 학술적으로 토론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했지만, 정부는 그 내용에 관심이 없고 막대한 물량의 홍보로 국민을 현혹한다. 간혹 정부 인사가 회의에 참석하면 의료를 걱정하는 시늉만 한다. 정부는 논의도 고민도 없이 그저 홍보에만 매진한다.

일부 휴진도 해봤지만, 환자 피해를 최소화하려니 준비하기 쉽지 않다. 전공의 진료 공백을 메우려고 당직을 서고 추가 진료를 하면 눈앞의 환자는 해결하지만, 현재의 폭압적 정책이 굳어져서 의사와 국민들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된다.

진퇴양난이다.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막무가내인 정권을 본 적이 없다. 대화, 설득, 항의도 소용없다. 총리도 장관들도 대통령 심기를 살피면서 공허한 의료개혁만 외치고 있다. 이젠 교수들도 전공의를 지지하고 지원하면서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다. 돌아보니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는가?

그러고 보니 윤석열의 성장 과정이나 정치 경력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민주당 정권에서 대립각을 세우다가 도박하듯 국힘에 들어와서 대선 후보가 되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왜 이렇게 황당한 정책을 거칠게 밀어붙이는지 짐작할 수 없다. 정치적 의도를 추정해 봐도, 국민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득 될 것 없는 정책을 죽자고 밀어붙인다. 한 마디로 어리석다.

역사학자 카를로 M. 치폴라에 의하면 사기꾼은 자신만 이득을 보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데, 어리석은 이는 남과 자신에게 모두 피해를 주므로 예측하기도 대응하기도 어렵다. 만일 대통령이 어리석다면 최악이고, 국가에 재앙이다. 이를 어쩐다. 대통령 임기를 마치도록 어리석은 똥고집을 견디고 살아야 하나? 꽉 막힌 상태가 풀리려면 어리석은 이가 자신에게 피해를 주고 물러나는 것뿐인데, 그런 일이 생길까? 생긴다면 나라는 또 얼마나 위험해질까? 고민하던 중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것이다. 그가 충동적으로 일 저지르고 자폭하는 과정을 새벽까지 지켜보았다. 권력자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에 따라 역사가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허무하고 황당했다. 윤석열이 저지른 과오가 크지만, 나는 그가 처단되기보다는 공정한 재판을 받고 합당한 판결에 따라 처벌되길 바란다.

이젠 권력의 공백을 차지하려는 정치 싸움에 의료 사태는 뒷전으로 밀리는 느낌이다. 정치인들은 미래에 벌어질 일에는 관심이 없다. 미래를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현재에 이용하려고만 든다. 올해 벌어질 의대 교육 혼란도 관심 없다. 당장 전체 국민의 피해로 드러나진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 우리 의료의 새로운 희망을 본다. 의료 농단을 겪으면서 의사와 의대생들이 빨간약을 먹고 깨어났기 때문이다. 의사이기 때문에 정부가 기본권을 제한하고 노동을 강요하는 모습을 보았다. 정치인들이 생색을 내면서 의료 제도를 개악하고 의료를 옥죄어도 사명감으로 환자를 진료하던 시대는 지났다. 

오랫동안 쌓였던 의료 제도의 모순이 이번 의료 사태로 드러났다. 이 모순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실타래를 풀기 쉽지 않지만, 앞으로 의사들은 모든 지혜를 모아서 의료 정책 변화에 적극 참여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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