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박사의 클래식음악산책]<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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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8.0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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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리스트(1811-1886)의 인생과 음악 <2부>

▲ 이종구(이종구 심장클리닉원장·예술의 전당 후원회장)

리스트는 당시 세계음악의 거장들(쇼팽, 베를리오즈, 슈만, 바그너)과 친구가 되었으며 1842년 이후 리스트의 음악은 전 유럽을 열광케 하였다. 특히 여성 팬들은 연주 후 리스트의 장갑과 손수건을 서로 뺐기 위해 난장판을 벌렸다고 한다.

그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인기와 최고의 출연료에 도취되지 않고 작곡을 계속하였으며 문학과 종교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글도 많이 썼다.

1847년(36세) 리스트는 러시아에 살고 있던 두번째이자 마지막 애인 캐롤린 공주를 만나게 된다. 그는 문인이었으며 결혼하고 딸이 있었으나 남편과 별거하고 있었다. 리스트는 큰 재해가 있을 때마다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자선연주를 하였는데 이때 캐롤린 공주가 거금을 희사한 것이 인연이 되어 만나게 된 것이다. 이 둘은 점차 사랑에 빠지고 캐롤린 공주가 러시아를 떠나 독일의 바이마르(Weimar)로 이사를 하면서 리스트를 초청하고 1848년부터 1861년까지 그곳에서 머물었다. 리스트는 피아노연주를 중단하고 궁전의 음악감독이 되어 작곡에 전념하면서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그 제자중 하나가 뷜로우(Bulow)였으며 후일 그는 리스트의 딸 코지마(Cosima)와 결혼을 했다.

바이마르에 머무르는 동안 많은 음악을 작곡하였는데 피아노 콘체르토 2개(1849), 피아노 소나타(B Minor, 1953), 15개의 헝가리 랩소디(1851), 12개의 교향곡(1848∼1861), 사랑의 꿈(Liebestraum, 1950), 그리고 파우스트(1954)와 단테(Divine Comedy, 1857)심포니 등 많은 유명한 곡들을 남겼다. 아마도 이때가 리스트의 가장 행복하고 생산적인 시절이었을 것이다.

1860년 리스트와 캐롤린 공주는 결혼을 하려고 했으나 끝내 교황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두 사람은 카톨릭 신앙을 저버리고 결혼을 할 수는 있었으나 종교에 충실하기를 원하고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1866년 캐롤린 공주는 로마의 빌라에 자리 잡고 26년간 그곳에 살았는데 그동안 단 한번만 24시간 이상 집을 떠나며 은둔 생활을 택했다.

리스트는 로마, 바이마르, 부다페스트를 왕래하면서 종교음악을 작곡하였으며 부다페스트에 음악원을 세우고 초대원장을 맡았으며 종종 캐롤린을 방문하면서 여생을 지냈다. 리스트는 총 38년이란 긴 세월동안  캐롤린을 지극히 사랑했으며 로마에 머무르는 26년 동안 편지를 자주 보냈는데 그가 쓴 편지는 후일 600페이지 책 4권으로 출판되었다. 리스트는 1886년(75세)에 바그너가 사망한 후 딸 코지마가 주관하는 바이로이드 페스티벌에 참가했다가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캐롤린 공주는 그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 둘이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왜 정신적 사랑만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종교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큰 몫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리스트는 뛰어난 음악인일 뿐 아니라 거의 수업료도 받지 않고 400명의 제자를 가르쳤으며 유럽에서 큰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자선 콘서트를 열어 이재민들을 도왔고, 또 베토벤의 동상건립기금을 마련해 주는 등 덕망이 높은 인간으로서도 기억되고 있다. 의사들은 좋은 인간이 되어야 좋은 의사가 된다고 한다. 음악인들도 좋은 인간이 되어야 훌륭한 음악이 나올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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