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회 봉사활동은 한달에 두번 장미회 본부를 방문하고 나머지 환자들은 평일에 자신의 병원에서 진료한다. 장미회와의 인연은 지난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세브란스병원에 재직할 당시 닥터 로빈슨이라는 미국인 선교사가 간질 발작을 일으킨 여학생을 데려온 것. 당시 간질 치료약을 구하기 어려웠고 비싼 약값 때문에 병원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박 원장의 마음은 이들에게 기울었다. 1974년 서울기독교의사회가 중심이 되어 사단법인 '장미회'가 발족됐다. 이후 장미회는 200명이 넘는 의사가 참여하고 9만명의 간질환자를 돕는 대규모 단체로 성장했다. 박 원장은 제2대 회장으로서 1982년부터 1998년까지 장미회를 이끌었고, 지금도 이사장으로서 활동 중이다.
네팔에 68번 가다
박 원장은 이달 12일부터 19일까지 네팔에 다녀왔다. 이번이 68번째다. 네팔 장미회 진료봉사를 하고 돌아온 것. 네팔인 제자를 둔 게 인연이 됐다. 박 원장의 강의와 활동에 큰 감명을 받은 네팔인 여의사는 본국으로 돌아간 뒤 네팔에도 간질환자를 보듬을 수 있는 단체가 필요하다며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박 원장은 약품과 후원금을 보내주고 1984년 네팔을 방문해 이듬해 네팔 장미회를 설립했다. 간질환자를 주로 진료하는 병원을 설립해 한국 의사들을 파견하는 것은 물론 1995년 네팔 국립직업훈련소를 위탁받아 네팔 정부와 공동운영하고 2003년엔 극빈자 거주지역에 진료소를 설립했다. 1993년부터는 네팔 학생 12명을 한국에 초청해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면서 대학과 대학원 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그의 봉사는 파트 타임이 아니라 삶 자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4년 네팔 국왕으로부터 외국인에게 최고의 영예인 3급 훈장을 수여받았다. 국제간질학회와 국제간질협회가 공동으로 2년마다 수여하는 상을 받았을 때가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의 모교에서는 1997년 제2회 연세의학대상 봉사상을 받았다.
박 원장은 어떻게 4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험난한 희생과 봉사의 길을 걸어왔을까 궁금했다. "이곳(서울 광화문 세종로)에서 개원한지 30여년 됐습니다.
장미회 활동을 같이 하고 있는 조완숙 부원장과 함께 한 지도 32년 됐지요. 우리 수간호사도 30년 넘었어요. 봉사활동도 마찬가지죠. 정들어서 인연을 끊을 수가 있어야지요." 선택이라기 보다는 주어진 순리대로 살았다는 그의 꾸밈없는 솔직함은 잔잔하지만 강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는 자살 방지를 위한 상담전화인 '생명의 전화'를 만들었다. 2003년에는 자살예방센터를 열어 상담 교육을 하고 2004년에는 한국자살예방협회를 창립해 이사장을 맡아 자살에 대한 언론 보도지침 제정과 모니터링 및 상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북한 대학에 간질센터 설립 진행
1997년 처음 북한을 방문한 뒤 1998년 '한민족복지재단' 의료담당 공동대표로 활동 중이다. 그동안 13차례 북한을 방문하면서 평양의과대학병원과 평양 제1인민병원 등에 의료장비 지원과 교육협력을 진행했다. "전 정치는 잘 모릅니다. 의료인이지요. 정치만 개입하지 않으면 의학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장미회와 연세의대 안과학교실이 함께 평양의과대학 간질센터 설립과 종양연구소 건립을 진행 중이다.
"보령의료봉사상을 받게 된 것은 고맙고 더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무료봉사라고 하지만 사실은 제가 얻고 배우는 게 더 많습니다."
그는 이번 상금도 모두 기부할 생각이다. 상금을 4부분으로 나눠 '생명의전화'와 장미회, 북한 간질센터, 그리고 연세의대에 장학금으로 사용하기로 약정했다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