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의 애상, 보드카

겨울날의 애상, 보드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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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12.08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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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혁(대한공중보건의사협의회 정책이사)
모처럼 일을 일찍 마치고 한가롭게 보내는 오후다. 계획했던 일이 일찍 마무리되는, 흔치 않은 행운이 겹쳐 잠깐의 여유를 선물받았다.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는 사회인들에게는 이렇게 아주 가끔이나마 오후의 망중한(忙中閑)을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여유시간에 창밖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그 순간만큼은 영락없이 고독한 남자가 된다. 창 밖 북악산의 겨울풍경을 바라보면 순간 시베리아 평원에 온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풍경과 함께 겹쳐지는, 희미하게 반투명으로 비치는 나의 반사된 모습은 스스로를 읽고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만든다.

가끔씩은 갑자기 가슴속 깊은 곳의 아련한 추억들이 떠오른다. 대체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유리창에 보인다.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오는 날이면 더욱 그렇다. 아, 그것은 외로움일 것이다. 진정 외로움은 아닐 것이라고 부정해 보지만, 그럴 때마다 창 너머의 풍경을 배경삼아 보드카 잔을 들이키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한다.

보드카는 추운 겨울날의 풍경과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 차가운 냉동실에 보관하여도 얼지 않으며, 마실 때는 차갑지만 식도로 넘어가면서는 기름을 붓고 불을 당겨놓은 듯 활활 타오르며 내려가는 느낌이다. 술기운이 올라오면 여타의 술과는 달리 오히려 순한 양이 된 듯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지는 느낌을 준다.

겨울의 풍경과 함께하는 보드카 한 잔, 그리고 여기에 방안을 채우는 조용한 음악까지 곁들이면 숲 소리, 새소리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며 조그마한 방 안에서는 광활한 대지의 서막이 펼쳐진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외로움에서 잠시 벗어나, 나름의 행복을 꿈꾸게 된다. 그리고 그제서야 유리창에 비친 모습 속에 내가 아닌 네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그토록 갈망해오던 사랑….

보드카는 그 술이 풍기는 특유의 서정적인 분위기 외에도 마시는 방법 등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위스키 등 여타 주류와 구별되는 특색이 많은 술이다. 평균 40도이며 시베리아 북부에는 96도짜리도 있을 정도로 매우 독한 술이기에 냉동실에 보관하였다가 알코올성분 특유의 냄새와 맛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단숨에 바닥까지 들이켜야 한다.

잔을 비울 때는 전체가 함께 들이키기 전에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자리를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간단하게나마 발언을 한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회식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단 잔이 비어있으니 채우고, 채웠으니 마시는' 그런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한잔 한잔에 의미를 담아 모두가 모두에게 모두를 위하여 마시는, 깨끗하고 차가운, 독하면서도 부드러운 술이 보드카이다.

무더운 여름밤에 시원한 맥주가 있고 낙엽이 지는 가을날에 와인이 있듯이 추운 겨울날에는 보드카가 있다. 눈이 내리는 겨울날, 잠시 시간을 내어 바쁜 일상을 돌아보며 잠시 잔을 들고 모두가 서로를 위해 건배해 보는 것은 어떨까. 외로움에 방황하기보다는 함께할 수 있는 행복함에 감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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