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존엄사'란 무거운 화두를 던지고 본인 스스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첫 번째 사례가 된 김 할머니.
대법원의 확정판결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지 201일 만인 10일 오후 2시 57분, 수 많은 논란을 뒤로 한채 영면했다. 김 할머니 사건은 삶과 죽음을 숙명으로 여기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생명관에 정면으로 맞선 혁명적인 도전이었다.
특히 '인간다운 죽음'의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의학적으로 의미 없는 치료의 중단 과정 및 절차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제 김 할머니가 남긴 죽음의 의미를 법과 제도로 승화시키는 일이 남아있다. 이미 대한의사협회는'연명치료 중단지침'을 통해 입법의 원칙과 방향을 제시했다.
2월 임시국회가 열리면 한나라당 신상진 의원·김세연 의원 등이 발의한 존엄사 관련 법안에 대한 본격적인 심의가 시작된다. 사회의 모든 역량과 관심이 집중돼야 하는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 그래서 최근 불거지고 있는 김 할머니 유족과 세브란스병원 사이의 의료사고 갈등은 안타깝다.
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 제거와 의료사고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의료분쟁 소송을 통해 설령 의료진의 과실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한 대법원의 판결은 바뀌지 않는다.
반대로 의료진의 무과실이 입증됐다고 해서 어머니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고 요청한 유족을 비난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김 할머니에 대한 부검 실시, 유족들이 병원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들의 확산은 연명치료 중단과 의료사고, 아무런 관련 없는 두 사안을 기묘하게 연결시켜 본질을 흐리게 하고 있다.
치료를 중단한 김 할머니가 의료진의 예상보다 오래 생존한 사실을 놓고 '지속적 식물상태'를 연명치료중단 대상에서 빼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김 할머니가 우리 사회에 존엄사 논의의 불을 지폈다고 해서, 그 분의 병상기록이 법·제도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 국회의 심의가 진행되는 동안은 김 할머니는 잠시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