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만빈(계명의대 교수 동산의료원 신경외과)
러시아의 작가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이 쓴 <암병동>이란 소설이 있다. 쉰 살 가까운 '돈초바'라는 방사선종양학과 과장이 암병동에 근무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의 방사선 허용량도 무시하고 가정도 거의 돌보지 못할 만큼 바쁘게 환자들의 치료에 전념한다. 또한 후배의사들을 전심전력으로 가르쳐주며 돌보아 주기 때문에 '엄마'라고 불릴 만큼 존경도 받는다.
어느 날 그녀는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교외에 살고 있는 은퇴한 자기 스승에게 찾아가 자신의 위장 검사를 부탁한다. 왜 젊고 유능한 동료 의사한테 검사를 의뢰하지 않느냐고 스승이 묻자 스승이 살아 계시는 한 스승한테 진단받기를 원한다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스승한테 "왜 이런 불공평한 일이 생길까요? 왜 종양의 전문인인 제가 종양한테 당해야 하는지…."라고 하소연한다. 그러자 스승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거꾸로 그것은 대단히 공평한 거야. 그것은 참으로 성실한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지.
자네는 간호사 파나 페도로바를 알고 있지? 그녀가 한 번 나에게 이렇게 말하더군. '아, 저는 점점 환자들한테 불친절해지는 것 같아요. 다시 제가 입원해 봐야겠어요···."라고. 그러자 돈초바는 '과거의 생활은 화려하거나 즐거운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저 일과 환자가 잘못될까 하는 불안의 반복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 생활은 얼마나 즐거운 것이었던가. 이 생활에 이별을 고한다는 것이 눈물겨운 괴로움이 아닌가!' 하고 회상한다.
스승은 그녀의 위장 검사를 시행해주고 진행된 암이라는 진단을 내려준다. 진단을 받는 순간 그녀는 '이제는 더 이상 남의 생사를 판가름할 수는 없다. 자기도 며칠 후에는 똑같이 가련하고 어리석은 환자로써 병원의 침대에 누워서 외모 같은 것에는 무관심해질 것이다.
치료는 제대로 되고 있는지, 환자복을 벗고 언제 집으로 갈 수 있는지, 그러한 자질구레한 평소의 권리가 마치 최고의 행복처럼 그립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내 젊었을 적 의사생활을 뒤돌아본다. 그때는 환자와 나는 별개의 인간 같았다. 나는 베푸는 자였고 환자는 받는 자처럼 보였다. 종유석이 물방울을 흘려 석순을 키우듯이 나의 땀방울이 환자들을 치료한 것처럼 생각했었다.
내가 나이가 들자 한번씩 병에 걸렸다. 내가 의사이고 내가 환자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와 환자가 같은 인간이고 또한 나와 환자와의 간격이 무척 좁혀졌음을 깨달았다. 마치 종유석과 석순의 구성물질이 같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간격이 좁혀지듯이.
중병을 몇 번 거쳤다. 지금은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 석주가 된 듯, 나와 환자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아팠을 때 절망했었다. 병만 낳게 해준다면 환자들을 내 몸같이 돌보리라고 수없이 다짐했었다. 그러다가 회복해서 하루하루 살다보니 어느 순간 그런 다짐이 내 머릿속에서 깨끗이 사라졌었다. 그러다가 또 다시 아팠다. 문득 환자들을 소홀히 대한 것 같은 죄책감이 울컥 솟아올랐다.
신이 한 번 더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종유석과 석순이 붙어 단단한 석주가 되듯이, 환자와 내가 단단한 한 몸이 되어 그들을 내 몸같이 돌보리라고 다짐해본다.
그 동안 변변치 못한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