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주 서울의대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비밀번호가 뭐에요?"
아이는 재차 묻더니 더 이상 말이 없다. 아뿔싸, 말릴 여유도 없이 이미 잘못된 번호를 눌러 버렸다. 내 핸드폰을 자꾸 열어보는 둘째 때문에 최근 비밀 번호를 바꿨는데, 잠시 다른 일을 하느라 대답을 못한 사이에 일이 터졌다. 전화를 돌려받아 보니 이미 핸드폰은 비활성화돼 잠겨버린 상태였다.
아뿔싸, 아무리 생각해도 바꾼 비번이 생각나지를 않는다.
한 두 시간을 낑낑대다, 결국 깨끗이 포기하고, 네이버의 권유에 따라 동기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백업을 제대로 하지 않는 습관 탓에 지난 몇 달간의 모든 사진들, 기록들, 대화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몇 달간의 기억들이 사라져버렸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핸드폰을 허락도 없이 만진 아들에게 화를 내보지만, 정작 한심한 건 비번 하나 제대로 기억 못하는 내 자신이다.
게다가 온갖 톡방에서 몇 년간의 대화 기록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내 삶이 모두 리셋되어 버린듯한 무력감에 빠져버렸다. 인터넷 사이트를 새로 로그인하고, 앱을 다시 깔아 보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전과 같은 상태로는 만들 수 없었다. 그러다 마음이 오히려 차분해졌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들어온 것이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던 앱은 기억나지 않아 다시 깔기를 포기하고, 자연스레 많은 단톡 방 기록은 사라져 버렸다. 많은 메모리가 날라갔지만 그만큼 핸드폰은 가볍게 돌아갔다. 왠지 모를 무거운 것들이 사라져 버린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그래 가끔은 이렇게 새로 시작해도 좋겠구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겨울이 그렇게 깊더니만 그래도 다시 봄이 돌아왔다.
산수유 나무에 연두빛깔을 머금은 노란 꽃을 시작으로 이제 곧 꽃이 필게다. 학생들은 모두 새학기를 맞아서 분주히 돌아다니고,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로 환자분들의 복장도 한결 가벼워졌다. 새로운 시작인 게다. 한 해의 진정한 시작은 1월이 아니라 봄이 와서 자연이 회생하는 3월이어야 마땅하다.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거의 6개월만에 다시 만난 그 환자분을 못 알아볼 뻔했다. 그 사이 외모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깔끔한 바지 정장 차림에 세련된 숏컷으로 멋을 부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다.
암 수술 한 지 2년이 벌써 지났구나. 환자 차트에 적힌 수술날짜를 힐끗 보며 새삼 지나간 시간에 놀란다.
"저 요즘 다시 출근해요!"
"오! 축하드려요. 힘들지는 않으세요?"
"지난 몇 년의 경력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아요. 젊은 사람들은 그 사이 치고 올라오고…. 제 몸은 생각보다 쉽게 피로해지더라구요. 이전엔 끄떡없이 밤새서 일하곤 했는데, 한 두 시간 일하면 피곤해서 쉬어야 하는데 어디 마땅히 쉴 수도 없고…."
나는 알 수 있을까? 그들에게 환자 역할에서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정상인 아닌 정상인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고작 핸드폰에서 사라진 사진들, 대화들에 속상해 화를 내고 하루 종일 기분이 상하고, 기운이 빠져있었는데, 6개월 이상 사회와 떨어져서 과거로부터 단절돼 있는 경험은 어떤 것일까? 길을 달려서 도착한 끝에 커다란 안개 낀 호수 앞에 서있는 것 같은 기분일까?
"그 동안 친구들 만나는 것도 싫고 가족 모임에도 잘 안 갔어요. 병원에 다니는 게 유일한 외출이었거든요.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게 두려웠거든요."
그녀가 힘들어하는 건 과거와 연결된 삶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어려움일까? 아니면 새로 시작함에 대한 두려움일까?
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고, 회복했지만 무언가 다른 불편한 느낌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가야 하는 환자들에게 사회로 다시 돌아가고 다시 일상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환자들에게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그리고 그들이 돌아가야 할 사회를 같은 입장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동안 관심을 두지 못했던 사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환자들이 돌아가 만나는 사회는 과연 구성원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현대 사회일까? 약하고 돌보아야 하는 환자를 짐으로 여기지 않고, 그의 불편감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사회로 준비되어 있을까? 과연 현대 사회란 무엇일까?
'현대적'이라는 형용사는 19세기 중엽에 들어서야 명사화돼 '현대성'이라는 용어가 생겼으며 그것도 예술의 영역에서 처음 사용됐다고 한다. 현대성에 대해서 처음 이야기 했던 보들레르는 관습적인 틀에 박힌 편견으로 가득 차 새로운 자극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며 무디게 살고 있는 평범한 일반인의 능력이 결여돼 있는, 그렇기에 오히려 새로운 시각을 줄 수 있는, '아이'와 '천재'의 시각을 통해 새로운 예술이 탄생한다고 설명한다.
평범한 일상이 평범하지 않게 느껴지는 환자들의 경험과 감각을 아이와 천재의 시각으로 여겨보면 어떨까? 우리 사회는 다양한 경험과 다른 감각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풍요롭게 될 수 있기에 오히려 그들이 복귀한 직장은, 그 사회는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오히려 단순한 일상 업무로 지친 구성원들에게, 다른 통찰력으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 환자나 약자를 동정하고 자신들과 동일화 시키려 하는 사회가 아니라,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 시각으로 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모습이 보들레르가 이야기하는 현대 사회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환대하는 사회이고, 지속 가능하고 우리가 꿈꾸는 사회가 아닐까?
환자는 단절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 시작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이렇게 시작되는 새로운 미래를 받아줄 수 있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병원을 나서는 환자들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외래 앞에 시 한 소절을 적어두고 싶다.
"게으름과 타성의 늪에 빠질 때마다 한없이 뜨겁고 순수했던 우리의 첫 열정을 새롭히며 다시 시작하는 기쁨으로 다시 살게 하십시오."
-이해인 '다시 시작하는 기쁨'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