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조그만 진료실에는 매일 수십 명의 환자들이 스쳐간다.
몇 주 또는 몇 달에 한 번씩, 수년 동안 만나고 있는 의사는 생판 남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인생에 절대 들어올 일이 없는 완벽한 타인이다.
환자들은 가끔 그런 나에게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주곤 한다. 전시회에 걸린 한 장의 사진처럼 내 진료실에는 환자들이 남긴 수많은 인생의 한 컷이 남아있다.
"얼마 전에 뵌 것 같은데 또 뵙네요."
할아버지가 보청기를 만지작거리신다. 큰 소리로 한번 더 말했다.
"얼마 전에 뵌 것 같은데 벌써 또 뵙네요."
"그렇지? 이제 잘 들리지도 않아요. 나이 들면 시간이 더 빨리 간다구. 이제 나 같은 늙은이는 곧 죽어야지."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건강하신데요, 관리를 너무 잘하셔서 그런 말씀 하시려면 아직도 멀었어요."
84세, 몸집이 조그마한 할아버지다. 늘 손바닥만한 수첩에 반듯한 글씨로 매일 같은 시간에 잰 혈압과 혈당을 적어 오신다. 매일 정확히 정상 범위의 혈압과 혈당이다. 내게 진료를 받으신지 10년이 되어 가는 동안 한번도 정상 범위를 벗어난 적이 없다.
"옛날에 나 보던 의사가 나보고 얼마 못살거라 그랬어. 내가 옛날에는 혈압이 200을 넘고 그랬거든. 그때는 내가 80㎏가 넘었어. 매일같이 고기를 먹구…."
그제야 그 분의 과거력이 이해가 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혈압과 혈당을 철저히 관리하시는 분이 심장 혈관에 스텐트를 3개나 가지고 있는 것이 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옛날에 밀수를 했거든. 그때 매일같이 **시장에서 갈비를 먹었어. 그 시절에 말이야, 늘 형사가 따라붙고 스트레스가 말도 못했지. 그 당시에는 **병원이 최고였어. 선교 병원이라서 미국에서 바로 가지고 온 약을 썼거든. 그땐 내가 그 병원을 다녔는데, 그때 의사가 나보고 그렇게 살면 얼마 못살거라고 했어."
순간 진료실은 오래된 영화관이 되고, 내 앞에는 낡은 영사기가 돌아가며 비추는 흑백의 영화가 펼쳐지는 듯했다. 내 앞에는 머리가 하얗게 샌 조그마한 할아버지가 아니라, 건장한 체구의 배짱 두둑한 밀수꾼이 앉아있었다.
저 반듯한 글씨는 밀수 장부를 적느라 생긴 습관이었을게다. 지난 사 오십년 동안 대한민국의 변화만큼이나 역동적이었을 그 분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형사들에게 쫓기던 젊은 밀수꾼은 이제 조그만 수첩을 가지고 다니는 선량한 얼굴의 노인이 되었다.
그 때 그 의사는 아마도 이 분이 2019년 어느 날 어느 의사 앞에 반듯하게 앉아계실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겠지. 그 시절에 2019년의 강남 빌딩 숲을 상상할 수 없었 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