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혁 대한의사협회 총무이사
의협집행부와 사직전공의 선생님들과의 간담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른바 탕핑 전술의 문제점에 대해서 의견을 개진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한 전공의 선생님이 세월호처럼 가만히만 있다가 잘못될 우려도 있으나 단일대오가 깨질까 봐 문제 제기하는 것이 조심스럽다는 답변을 했다.
단단한 투쟁 동력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내부 논쟁 등 구성원 간의 민주적 소통이 필수인 것인데, 의견을 내지 않는 것이 단일대오를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것에 대해 동의하기 어려웠다.
먼저 몇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전공의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으면 투쟁에 승리할까?
누워만 있어도 전공의 착취를 통해 운영되던 수련병원은 망할 것이고 의료가 붕괴될 것이며, 그 결과 정부는 무릎을 꿇고 요구사항을 들어줄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는 의사 중심적 사고에서 파생된 착각이며 교만이다. 당장 해를 넘기는 현 시점에 문닫은 대학병원이 있는가? 운영방식은 달라졌으나 망하지 않았다.
한편 의사 중심의 의료제도는 당위인가? 그렇지 않다. 불과 30여년 전만 해도 약사가 대한민국 일차의료의 일부분을 책임졌다. 해외 선진국을 보면 간호사가 의사 역할을 일부 위임받은 곳도 있다. 물론 우리나라도 시골 일부 지역은 아직도 그러하다. 의료제도란 한 국가의 사회, 경제적 여건을 고려한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일 뿐, 정답 또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전공의 공백이 1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수련병원은 이미 3만여 명의 PA간호사가 의사업무를 위임받아 업무에 적응하고 있다. 전공의 착취를 기반으로 대학병원을 유지하는 것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관료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에 대한 해법으로 PA제도를 간절히 원했었다. 하지만 일반의에게도 진료받기를 꺼려하는 국민정서상 쉽게 도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전공의 사직으로 병원이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 되자, 그 책임을 의사들에게 전가하며 PA간호사 제도를 여야정 한마음으로 통과시켰다. 내심 기회라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의대생 휴학 투쟁은 어떠한가?
학생운동은 본질적으로 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사회적 관심사로 만들기 위하여 80년대 학생운동을 보면 분신, 화염병 등 대단히 폭력적임을 알 수 있다. 파업 등으로 비교적 손쉽게 사회적 관심을 끌 수 있는 사회노동운동과 다르다. 물론, 정치적으로는 교육이라는 사회 근간이 흔들리는 문제로 학생들의 투쟁을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의대생 휴학 투쟁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짊어져야 할 대통령이 탄핵 발의로 직무정지가 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의료대란을 일으킨 원흉이라는 측면에서 탄핵된다는 사실이 의사들에게 대단히 후련하고 감정적으로 기분 좋을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실제로 탄핵이 되어버리는 상황 자체는 휴학투쟁의 협상력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의료대란의 정치적 책임이 대통령에 있고 그 대통령이 직무정지가 되었는데, 다른 어떤 정치인이 정치생명을 걸고 굳이 의대증원이라는 난제에 손을 대겠는가?
결론적으로 전공의 사직 및 의대생 휴학 투쟁은 초반에 비해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었고, 이는 정부를 상대로 한 협상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조심스럽게 언급한다면, 전공의와 의대생의 투쟁체가 정말로 단단하고 건강한 지에 대해서 고민해볼 것을 권유한다.
일전에 의사회 활동을 하는 젊은 선생님과 이야기하던 중 ‘2020년 최대집 회장이 독단으로 의정합의를 했다는 대전협 회장의 주장은 허위사실’이라는 2심 판결이 난 사실이 화두에 오른 적이 있었다. 속된말로 4대악 투쟁에서 대전협이 의협 뒤통수를 쳤다는 의미로, 많은 전공의 선생님들이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 선생님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당황스럽게도 ‘사실관계가 다른 것은 알지만 그게 어때서’라는 반응이었다.
한마디로 의협이 뒤통수를 쳤다고 해야 지금의 전공의 단일대오가 더 잘 유지될 것이기에 2020년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최근에 교수들을 중간착취자라 비판하면서 세대간 갈등이 전공의의 단일대오를 만들어내는 데 활용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갈등으로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대오는 확장성이 없으며 단단하지도 않다. 더불어 구성원 간 치열한 내부 논쟁과 같은 민주적 소통과정도 부재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조직은 말 그대로 모래성과 같다. 외형상 그 틀은 유지하고 있으나 어느 한 순간 위기가 오면 순식간에 무너지기 쉽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결국 투쟁의 종결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국민은 의사들의 투쟁목표를 2025년 의대증원 원점논의로 알고 있는데 동의하고 있을까? 2000명 증원반대에는 동의하겠으나, 증원 자체는 해야 한다는 정서가 지배적이다. 결국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2025년 대학입시가 종결되어가는 현 시점까지 투쟁목표가 바뀌지 않는다면, 이번 투쟁은 사실상 패배한 것이다.
안타깝지만 2025년 의대증원 정책은 시행될 것이다. 잘못된 의료정책이 강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만 잘못된 정책이었나? 불과 30여년 전에는 리베이트 근절 등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매년 수조원의 비용이 추가로 들어가는 의약분업을 강행했다.
대한민국 건국 당시부터 인정되었던 한의사제도를 선진국에서는 어떻게 바라볼까? 성별을 바꾸는 처방조차 한의학적 원리에 근거하여 한의사가 시행한다면 사실상 법적으로 인정된다. 치료는 고사하고 기형을 유발할 우려가 있는 난임한약을 국가 시범사업으로 재정을 투여하고 있다. 아마도 2000명 증원 이상으로 말도 안되는 제도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의사들은 무엇을 했나? 사실 나름 꾸준히 투쟁을 해왔다. 그리고, 당시 투쟁의 현장에 있었던 의사들 또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결론은 의약분업제도는 현재이며 한의사제도 또한 건재하다. 의사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지점까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이다.
의대증원 원점논의가 수면위로 드러난 투쟁목표였다고 하지만, 이것만으로 지난 1년간 의대생, 전공의의 절실함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진실로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 지에 대해서 물어보면 답변은 모두 제각각이었으나, 올바른 의료생태계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은 한결같았다. 적극적인 전공의선생님, 의대생들은 의협에 직접 와서 항의하기도 했고, 아예 의협집행부에 참여하여 의대 증원 저지를 넘어선 그 이상의 비젼를 실현할 단초를 만들어 보려는 노력을 하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의료생태계는 가만히 누워만 있다고 누가 가져다주지 않는다. 우리는 선후배를 떠나 동지이다. 이 동지들의 모임에 참여를 넘어서 주도하는 후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