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박사의 클래식음악산책]<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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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4.23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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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음악의 마지막 황제인가?

▲ 이종구(이종구 심장크리닉원장·예술의 전당 후원회장)

카라얀은 마지막 수년을 제외하고 무려 35여년 동안 베를린 필을 완전히 지배하였으며 토스카니니(Toscanini)나 카라얀의 전임자 푸르트뱅글러(Furtwaengler)가 만들어 내지 못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음향을 만들기 위해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혹독하게 연습시켰다.

카라얀이 그들을 그렇게 혹사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의 탁월한 능력과 카리스마의 탓이었지만 그가 순회공연과 레코딩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을 단원들에 후하게 뿌릴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요소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황제적 독재자의 권위는 언젠가는 추락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카라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1982년에 시작되었다.

카라얀은 한 유능한 여성 클라리넷 연주자를 영입시키려 했으나 단원들은 그가 여자이고 카라얀이 추천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언론은 카라얀을 여성옹호자로 호평하였지만 그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84년에는 오케스트라의 지배인이 물러난 후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화합이 이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카라얀이 한 불실한 연주자를 해고하려 하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소송을 제기하고 카라얀이 패소하였다.

그러자 카라얀은 베를린 750주년 기념 해에 1년 동안 단 6번만 연주를 하고 모든 순회공연과 레코딩을 취소하고(결과로 단원들의 수입이 감소하였다) 한 국가의 원수가 방문했을 때 그는 배탈이 났다는 이유로 연주장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 다음날 건재한 모습으로 일본을 향해 출발하는 해프닝까지 연출하였다.

카라얀은 노년이 되면서 허리에 대수술을 받게 되고 두명의 지휘자가 트리스탄과 이솔데를 지휘하다가 거의 같은 장면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진시왕이 불로초를 찾듯이 죽음에 대해 집념하게 되고 그는 지휘로 인한 스트레스와 심장에 대한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거금의 연구비를 지원해 연구소까지 만들었다.

무엇보다 카라얀이 원했던 것은 그의 선임자처럼 지휘자의 명칭뿐만 아니라 예술 감독이 되어 단원들을 선발하는 권리와 자기의 후계자를 지명하는 특권이었다. 그러나 베를린 필은 모든 단원들이 주인인 민주적 전통을 고수하면서 이것이 실패하자 1989년 사망하기 얼마 전 베를린 필에 사표를 내던졌다.

카라얀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제임스 레바인의 보호자격이었으며 그를 자기의 후계자로 만들고 싶어 했으나 이것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카라얀의 나치 연루 때문에 미국의 유태인 출신 음악가들은 그를 냉대했으며 줄리아드 음대의 이사장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삭 스턴과 이스라엘 출신의 아이삭 펄만은 카라얀과 협연을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카라얀은 유태인 출신의 미국인 레바인을 자기의 후계자로 만듦으로써 자기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완화시키고자 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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