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만, 리스트, 쇼팽, 베를리오즈 등 많은 위대한 작곡가들에게 사랑은 영감을 주었고 큰 자극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에게는 사랑보다는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이 그 동기를 부여했을 것 같다. 일부에서는 쇼스타코비치를 공산주의에 굴복하고 순종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회고록과 측근및 가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작곡가로 살아남기 위해 한때 협조를 하기는 했었지만 끝까지 스탈린의 잔인한 독재에 저항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쇼스타코비치의 탄생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에서도 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KBS와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레닌그라드)을 공연한바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제정 러시아시절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피아노 공부를 했다. 1917년 러시아의 붉은 혁명이 성공한 후 1919년 쇼스타코비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그의 졸업 작품인 교향곡 1번은 1926년에 초연되었고 졸업 후 그는 피아노 연주자로도 활동하였으며 1927년에는 바르샤바국제콩쿠르에 참가하였으나 그의 정서적으로 경직된 스타일은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입상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거기서 지휘자 브루노 발터를 만났고 그는 베를린에서 교향곡 1번을 초연하였다.
그는 작곡에 전념해 1927년에 교향곡 2번 (10월)을 발표하였다.
1929년에는 오페라 '코'를 작곡하였으나 스탈린의 공산당 문화 관료들로부터 형식주의(Formalism)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형식주의란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과 미술 등의 장르에서 내용보다는 형식 또는 스타일 위주라는 부정적인 뜻이다.
1927년 그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지휘자였던 소렌티스키와 평생친구가 되었는데 그를 통해 말러(Mahler) 음악에 영향을 받게 되고 심포니 제4번을 작곡하였다. 이곡은 그 당시의 어둡고 비관적인 소련의 현실을 반영하는 듯 했으며 쇼스타코비치는 이 작품을 발표하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갈 것을 두려워하여 34년간이나 공연을 할 수 없었다.
쇼스타코비치는 1934년에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부인'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작품과는 무관하며 이 작품이 대중과 평론가로부터 호평을 받았지만 쇼스타코비치에게는 치명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 오페라는 절망적인 한 부부생활 중 처가 남편을 쥐약으로 살해하는 내용이다. 하루는 스탈린과 그의 공산당의 거물급 지도자들이 볼쇼이극장에 나타나 이 공연을 관람하던 중 스탈린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돌연 오페라 극장을 떠났다.
며칠 후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브다는 쇼스타코비치의 형식주의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이런 작곡가들의 장래는 좋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 후 그의 작품은 공연금지 되었고 작품의뢰도 고갈되고 그는 정부와 공산당이 제작하는 선전영화음악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