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박사의 클래식음악산책]<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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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1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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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탄압은 쇼스타코비치를
위대한 작곡가로 만들었나?

▲ 이종구(이종구 심장클리닉원장·예술의 전당 후원회장)

1917년 붉은 혁명이 성공하고 레닌이 집권한 후 러시아는 당분간 문화적으로 무엇이든지 가능한 자유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음악가, 문학가, 화가들은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은 아방가드주의를 실험하기도 했으며, 초기에 쇼스타코비치는 그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 후 스탈린이 트로츠기 등 정적을 제거하고 절대 권력을 장악한 후 경제는 어려워지고 수십만의 정치범들이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로 사라졌고 많은 '인민의 적'들이 공공연히 처형되었다.

스탈린은 러시아의 인민들은 행복하게 사회주의 건설에 동참하고 있다고 역설하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과 종교를 주제로 한 말러의 심포니를 좋아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4번은 행복, 환희,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주제로 한 듯했으며, 스탈린은 이곡을 용납할 수 없었고, 맥베스부인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 후 쇼스타코비치는 '올바른 비판에 대한 답'이라는 표제가 붙은 교향곡 5번을 작곡하면서 정치적 재활의 기회를 노리기도 하였으나 허사였다. 스탈린과 사회주의의 승리를 찬양하기 위한 예술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와 2차 대전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재생의 기회를 주게 된다.

1941년 히틀러의 군대는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900일 동안은 쥐를 잡아먹으면서 항복하지 않고 100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죽음의 저항으로 전쟁을 이겨냈다. 

이때 레닌그라드에 갇혀 있던 쇼스타코비치는 라디오를 통해 전 세계에 나치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면서 교향곡 7번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쇼스타코비치는 <Time>지의 표지에 나올 정도로 유명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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