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현(중앙의대 교수)
지금은 한참 유행이 지났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부류의 영화가 있었다. 바로 중국무술영화로 분류되던 장르의 영화들이다.
다소 진부한 스토리이긴 하지만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작정 무림의 고수를 찾아나선 한 젊은이는 어렵게 만난 사부로부터 무술을 배우기는 커녕 몇 년 동안 허드렛일을 하면서 고생만 한다.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다 겪고 나서야 사부로부터 조금씩 무술을 연마할 기회를 얻게 된다.
최근 대학 사회의 폭언·폭력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도제식 교육' 또한 화두가 되고 있다. 국어사전에서 '도제식(徒弟式)'이라는 말을 찾으면 '도제 관계와 같이 제자가 스승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던 방법'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사람들은 도제식 교육이라고 할 때 흔히 군대와 의사 사회를 예로 든다.
두 조직 모두 항상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되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일반대중들도 전부터 익히 들어왔거나 의학드라마를 통해서(실제 상황보다 더 심하게, 또는 약하게 묘사되곤 하지만) 병원 내에 엄격한 규율이 존재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음악가가 될 재원들이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 혹독한 성장통을 겪어왔다는 일련의 뉴스는 사뭇 충격적이었다. 마치 엘리트 체육으로 대표되며 단기간에 세계 정상급으로 성장한 한국 스포츠에서 일부 암암리에 묵인되어 온 폭력을 보는 듯하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스스로 무대에서 즐길 수 없을 때 과연 관객들이 함께 호흡하며 호응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의료계에서도 폭언·폭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부 의료인들은 아직도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긴박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폭언과 폭력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병원에서는 중국무술영화의 주인공처럼 갚아야 할 원수도 없고, 그 사부를 통해서만 배워야 하는 비법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제는 표준화된 진료지침, 프로토콜이 공유되는 사회이다. 현대 의료는 한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독특한 비방으로 환자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중심의학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또한 분야가 광범위하고 세분화되어 의료인간에 원활한 소통과 의견 개진이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한층 더 수준 높은 의술을 펼칠 수 있다. 억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선배 의사에게 환자 상태를 보고하기가 주저되거나 제대로 의견을 물어보기 힘들다면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의 몫이 된다.
상명하달이 갖는 수월함 때문에 환자나 보호자 앞에서 후배 의사를 심하게 하대(下待)하면 환자와 보호자는 주치의인 후배 의사를 형편없는 의료인으로 생각해서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 때는 더 심하게 배웠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자문해보자. 그래서 그때 정말 행복했는지, 지금이라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지.…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여러 번 바뀌어도 군대나 학교에서 폭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나 때도 그랬어, 다 그러면서 배우는거야"라며 문화나 전통으로 치부한다면 악순환의 고리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얼마 전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은사님을 송별하는 자리가 있었다. 항상 따뜻한 카리스마와 본인께서 몸소 실천하신 삶을 통해 제자 의사들을 가르치셨기에 마지막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아쉬움은 더 했다. 은사님은 마지막 인사로 "비록 몸은 떠나지만 스승으로서 귀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최근 공중파 TV의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새삼 멘토(mentor) 제도가 주목을 받고 있다. 다른 경쟁자들보다 화려하지도, 스타성이 크게 눈에 띄지도 않는 멘티(mentee)들을 품고 그들의 꿈을 위해 자신을 던진 멘토에게 네티즌들은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의료계에도 멘토나 프리셉터(preceptor) 제도를 도입하는 곳이 늘고 있다. '도제식 교육'하면 떠오르는 병원의 모습이 폭언·폭력을 통한 훈계가 아니라 진심으로 따뜻하게 조언해 주고 방향을 제시하는 멘토나 프리셉터의 모습이 되었으면 한다.
문득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후배들에게 멘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