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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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3.28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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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준 연세의대 교수(세브란스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김기준 세브란스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
김기준 세브란스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연명의료 거부서)를 작성한 국민의 숫자가 2019년 말까지 53만 명을 넘었으며, 이 중 실제로 연명의료 중단 결정이 이뤄진 사례는 약 8만 건에 이른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우리나라 국민도 존엄한 죽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에 많은 변화가 왔구나 생각했다. 아마도 무의미한 연명의료에 대한 국민 인식 변화와 개선책에 대한 요구가 있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법과 제도의 개선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연명의료란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시행하는 심폐소생술·혈액 투석·항암제 투여·인공호흡기 착용 등의 의학적 시술로서, 치료 효과는 없이 임종 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의학적 행위를 말한다. 이를 중단하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윤리적·법적·의학적·사회적 문제가 돼 왔다. 

환자의 회생 가능성 여부를 그 누가 자신있게 판단할 수가 있을까? 

1997년 '보라매 병원 사건'에서는 보호자의 요구에 의해 조기 퇴원한 환자가 사망했는데, 보호자와 담당 의료진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2008년 '김 할머니 사건'에서는 가족의 요구대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그 후 사회적 토론과 합의를 통해 연명의료결정법을 만들어 2018년 2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연명의료의 중단을 결정하려면 담당 의사(주치의)를 포함해 2명의 전문의에 의해 환자가 임종 과정에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선행돼야 하고, 또 연명의료 중단 결정에 관한 환자의 의사를 명확하게 확인해야 한다. 

환자의 의사 확인 방법은 법적으로 정해져 있다. 

의료기관에서 작성된 연명의료계획서가 있을 때,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있을 때, 의사를 표시할 수 없는 환자인 경우에는 평소 연명의료 중단에 대한 환자 본인의 의사가 있었음을 가족 2명 이상의 일치되는 진술이 있을 때, 이도 저도 어려울 때는 환자 가족 전원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상당히 복잡하다. 그 누구도 한 생명의 살고 죽음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는 인류의 보편적 양심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하면 주치의가 이행해야 한다. 여러 번 그 과정을 지켜본 결과, 가족도 힘들겠지만 주치의도 상당히 힘들다. 그래서 법적으로 이행을 거부할 수 있는 주치의의 권리도 보장해 두고 있다. 이럴 경우 병원장은 윤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주치의를 바꿔야 한다. 법으로만 규정하고 강제할 수 없는 살아있는 자들의 깊은 고뇌와 진한 슬픔이 느껴지지 않나?

필자는 아들과 딸, 아내와 함께 종종 존엄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 연명의료 거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필자를 포함한 그 어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한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비로소 완성된다. 

몇 년 전 가족들과 나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에 관해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그때는 반대가 심했다. 아마도 우리 가족 모두가 어리고 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니며, 운명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
 
벌써 이십 년이 훨씬 지났다. 고향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급하고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아버지가 위암이라는데, 빨리 큰 병원 가보라는데. 형 어떻게 해?"

'평소 아픈 곳도 없었고, 몇 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도 받으셨고, 그 맵고 짠 것도 잘 드시던 분이신데…술 담배도 일찌감치 끊으셨는데. 도대체 무슨 일? 아마 오진?'
 
급하게 서울로 모셔서 외래를 보고 위내시경을 시행하고 CT 촬영을 한 결과, 위암 3기. 또 급하게 수술 일정을 잡고 동분서주.

수술 전날.
 
"아버지. 암이 조금 진행된 것이라, 수술이 좀 클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아들이 의사라도, 수술을 받을지 말지는 아버지가 결정하셔야 합니다. 외과 주치의 설명을 잘 듣고 판단하시고 결정하십시오."
 
수술실로 가는 날 아침.

"혹 내가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 달고 그럴 상황이 되면, 집으로 보내 다오. 나는 답답해서 그런 데 오래 있으면 미친다. 부탁한다."

"무슨 말씀을? 수술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세계 최고의 위암 수술 명의에게 수술을 받으시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개복해 보니, 위 근처의 림프절과 복막은 물론, 간과 쓸개까지 전이된 4기 위암이었다. 주치의와 상의 후, 보이는 것은 다 제거하기로 나름 똑똑하다는 의사 아들이 결정했다.

'보이는 암을 모두 제거한 후, 항암치료를 받으면, 우리 아버지는 백 세까지도 거뜬하게 살 수 있을 거야.'
 
수술 당일 밤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다. 새벽에는 소변이 나오질 않았다. 다음 날부터 폐렴이 시작됐다. 항생제를 아무리 바꿔 써도 효과가 없다. 호흡곤란이 찾아와 중환자실로 이동했다. 기관내 삽관을 했고, 인공호흡기를 부착했다. 병세가 좋아졌다가 나빠지기를 여러 번 반복했고, 중환자실 입실과 퇴실, 기관내 삽관과 인공호흡기 부착도 수차례 반복됐다. 그러기를 두 달. 아버지의 폐는 하얗게 변했고, 전신 장기의 기능이 급격히 나빠졌다. 기흉으로 흉관을 삽관한 폐에서는 붉은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정 무렵. 삑삑거리는 모니터가 미워지도록 시끄러운 중환자실에서, 어찌해 보지도 못하시는 아버지 손을 가만히 잡아보았다. 가늘게 눈을 뜨시더니 깜빡깜빡 글썽글썽….새벽이 올 때까지 그 손을 놓지 못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절실했던 마음이, 마지막 소원이 가슴을 후벼팠다.

구급차에 아버지를 모시고 앰부배깅을 하며, 김해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원수 같았던 그 기관내 삽관 튜브가 주저주저 빠져나올 때, 강도 울고, 새도 울고, 바람도 울었다. 참 서럽고 서러웠다. 참 미웠고 미웠다. 의사인 내가, 대학병원 교수인 내가.

그립고 보고 싶다. 당신을 멀리 보낼 수밖에 없었던, 목련이 눈부신 이런 봄날.

얼마나 목이 타셨을까.

애간장이 끊어진다. 
 

패륜
 
배를 열어보니
이미 여기저기 전이된 위암
 
김 교수 어찌할까
그래도 최대한 제거해 주세요
꼭 이겨내실 거예요
 
여섯 시간이나 걸린 대수술
회복실에서 희미하게 웃으시던 가련한 모습
 
그날 밤 시작된 발열
곧 이은 폐렴
패혈증 호흡곤란
중환자실로 이동
기관내삽관 인공호흡기 부착
기흉 또 혈흉
두 달 후 결국 다발성 장기부전
 
집에 가자구요?
마른 눈 애처로이 깜빡 또 깜빡
그래요 고향 집으로 가요 아버지
여윈 눈 글썽 또 글썽
 
멀고도 멀었던 내 고향 김해
강도 울고 새도 울고 바람도 울고
 
이제 튜브 뽑을게요
많이 답답하셨죠
우리 곧 다시 만나요 아버지
 
가늘고 마른 목구멍에 박혀있던
원수 같은 그 숨대롱을 뽑고
모르핀과 진정제가 섞인 링거액 밸브를 활짝 열었다
 
그렇게 그렇게
대학병원 교수이자 의사인 나는
나를 만들고 키워낸 아버지를 멀리 아주 멀리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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