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정신과의사는 좋은 부모이자 어른의 본보기가 돼야 하죠”
최근 들어 ‘고유정 사건’이나 ‘그루밍 성범죄’와 같은 아동과 청소년, 나아가 남성을 대상으로 한 정서적 폭력의 피해 사례가 언론에서 종종 보도되고 있다. 기괴한 범행 수법과 교묘한 가스라이팅은 피해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 사회적 단절과 격리를 초래한다.
2014년부터 서울해바라기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김재원 교수(서울대학교병원 소아정신과)와 앞선 범죄행위 피해자들이 여성가족부 산하 공공기관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봤다. 서울해바라기센터는 통합형 해바라기센터로 365일 24시간, 의료진 및 관련 전문가가 상주하며 ONE-STOP으로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피해 여성과 아동을 지원하고 있다. 의료지원에는 정신과, 산부인과, 응급의료센터 전문의가 동원되고 있다.
더불어, 지난해 발간된 ‘밥보다 진심 : 내 마음 모를 때, 네 마음 안 보일 때 52개 진짜 마음 사용 설명서’(책밥상)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Q.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선 교수님께서 작년에 출간하신 책 <밥보다 진심>을 읽다보니 의사가 된 계기가 좀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용 중 “내가 의사가 되려고 했던 이유는 어려서부터 비롯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의사가 되고 나서 이와 관련해 어느 정도 노력의 결실을 맺으셨다고 생각이 되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글쎄요, 그 부분은 단순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하기 보다는, 어려서부터의 불안함과 더 관련이 있을 것 같네요. 내가 범(汎)불안장애가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범불안장애는 불안장애의 일반적인 유형으로, 6개월 이상 지속되는 과도한 걱정, 염려, 불안으로 사회활동에 심각한 제한이 생길 경우 진단되고 있다.) 자꾸만 과거에 잘못했던 일에 대해서 반추하고 자책하고, 또 현재랑 미래에 관해서도 걱정하고 불안했거든요. 어떻게 보면 ‘죽음’이 그 불안을 일으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제 의사가 되고 나니까 의사라는 직업은 결국에 죽음을 초래하는 병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치료를 통해서 죽음을 지연시키는 일을 한단 말이에요. 동기나 이유가 무엇이 됐든 간에 ‘죽음에 맞서 싸운다’고 할 수 있겠죠. 결국 이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은 나 자신을 포함해 자살, 자해, 죽음으로 불안해하는 이들의 극복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었던 거죠. 명예기자분도 수련을 하고 시간이 지나다 보면 자연스레 점차 죽음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을 거에요. 지금까지 생각을 안 했더라도 점점 더요.
Q. 정말 그럴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관계의 근원이 ‘애증’으로 시작된다는 대목이 많이 공감되었는데요. 어린이병원에서 진료하시다 보면 환자들과 평균적으로 더 오랜 기간에 걸쳐 라포(rapport)를 쌓아가게 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의사-환자 관계’에서 치료과정 중 느꼈던 ‘애증’은 없으셨을까요? 예를 들자면 선생님께서 기대했던 것에 비해 치료 경과가 좋지 않다거나 청소년기의 환자들이 치료를 거부한다든가 하는 경우 말이죠.
저는 소아정신과 의사는 좋은 부모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내가 진료 보며 만나는 부모들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많이 애쓰고 노력하겠지만요. 수련을 돌다가 역전이(치료자가 환자를 과거 자신에게 중요했던 인물을 대하듯 느끼게 되는 것)에 휘둘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어요. 또 투사적 동일시(환자가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감정이나 충동을 치료자에게 유발하는 기제를 말한다)라고, 아이가 부모와의 관계에서 보였던 모습을 재현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아이가 저를 ‘부모와 같은 어른’으로 생각해서 공격적인 반항을 하기도 해요. 어떻게 보면 꽤 자연스러운 건데, 여기에서 아이의 부모와 같은 반응을 해서는 안돼요. 어떻게 보면 말려드는 거거든요.
소아정신과 의사뿐만 아니라 의사라면 기본적으로 객관성과 중립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부모이자 어른’의 본보기가 돼야 하죠. 저를 찾아와 준 아이가 ‘아, 저 선생님은 내가 그동안 만나왔던 어른이랑 다르네. 내 말을 경청하고 공감을 해준다’고 생각이 들게끔 치료에 임하고 있어요. 물론, 그럼에도 스트레스를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네요.
Q. 저로서도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2014년부터 서울해바라기센터에서 일하고 계신데 주로 어떤 업무를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소장으로 있는 서울해바라기센터는 아동형과 위기지원형이 합쳐진 통합형이에요. 통합형은 서울에는 서울의료원에 북부, 보라매병원에 남부, 그리고 여기 연건동에 총 세 곳 있어요. 원래는 중앙의료원에 중부센터도 있었는데 작년에 없어졌죠.
센터 업무는 말 그대로 의료적인 서비스 처지가 응급하게 필요한 경우엔 통합형에서, 그렇지 않으면 아동형, 위기지원형 해바라기센터에서 맡는다고 보면 돼요.
하지만, 사실 결국에는 거주지 인근의 해바라기센터로 연계가 되고 있긴 해요. 통합형이 위기 지원형이나 아동형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심리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고, 바로 여기에 정신과 의사들이 투입되는 겁니다.
Q. 최근 ‘고유정 사건’이 상당한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를 모티프로 정유정 작가가 <완전한 행복>이란 소설도 발간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논란이 됐던 이유는 살해과정의 잔혹성 때문이 크겠지만, 저는 가해자의 지속적인 가정폭력 상황에도 눈길이 갔습니다. 보통 가정폭력이라고 하면 신체적 폭력을 떠올리지만, 이외에도 언어적, 정서적 폭력 형태도 있을 거잖아요. 가족 안에서의 따돌림이나 소외가 그 예 일 텐데요. 그렇다면, 정서적 폭력은 특정 성별에 관계 없이 가정, 직장에서 일어날 수 있지 않나 싶은데, 남성을 대상으로 한 해바라기센터의 지원이 따로 있울까요?
좋은 지적입니다. 해바라기센터에서는 남성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지원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다만, 10년치 통계를 내었을 때에 남성 피해자는 전체의 6% 정도 밖에 되지 않아요. 해바라기센터에서는 진료인력 성별을 여성 피해자들의 심리적 편의를 생각해서 여성으로 배치하고 있는데, 이런 환경이 남성 피해자들에게는 오히려 좋지 못한 환경이 되겠네요. 외국의 경우에는 남성 피해자 지원센터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사회적 여건으로 그런 분리는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면 됩니다.
Q.정서적 폭력만으로도 해바라기센터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실 정서적 폭력만으로 해바라기센터에서의 치료 지원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해바라기센터에서는 성폭력, 성매매, 가정폭력, 이 세 가지와 관련해 ‘성폭력 피해자 보호와 지원에 대한 법률’에서 규정된 부분에 한해서 지원할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해바라기센터의 설립취지 자체가 의료적 서비스 제공과 응급처치, 수사가 동시에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이것이 가장 필요한 건 성범죄 관련 사항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범죄 관련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보호막 역할을 해바라기센터가 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예민’과 ‘섬세’는 비슷하지만 달라요. 예민’은 ‘자기중심적’인 태도이고, ‘섬세’는 ‘이타주의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죠. “환자를 봄에 있어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환자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고, 나아가 인격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애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Q. 최근 19세 미만의 아동, 청소년 피해자 대상의 영상증인신문이 도입됐습니다. 논란이 있는데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사실 통합형 해바라기지원센터를 만든 것도 2차 피해를 최소화 하고자 한 건데요. 저 뿐만 이 아니라 해바라기센터에서 일하는 다른 분들도 영상증인신문은 일종의 대안일 뿐이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법정 진술 시에 물리적으로 분리된 공간에 있다고 하지만, 특히 미성년자의 경우는 성인보다 2차 피해에 취약하잖아요. 가해자의 방어권도 중요하지만 원래대로 아동 진술 녹화 영상을 자료로 제출하는 방식이 맞다고 봅니다.
Q. 귀한 의견 감사드립니다. 인터뷰를 마무리 하며, 이제 막 의사가 됐거나 의사가 될 후배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너무 어려운 질문이네요. 제가 책에도 썼지만 ‘예민’과 ‘섬세’는 비슷하지만 달라요. 예민’은 ‘자기중심적’인 태도이고, ‘섬세’는 ‘이타주의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죠. “환자를 봄에 있어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환자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고, 나아가 인격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애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정리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