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석균(의협 한특위 위원/의협 의료정책연구원 부원장)
수능 시험이 얼마 전에 끝났습니다. 킬러문항(초고난도 문항)을 내지 말라는 대통령의 뜻에 따라 교육 당국 기준으로 킬러 문항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쉬운 수능을 기대하고 시험에 임한 재학생과 n수생들의 바램과 달리 입시 전문가의 예상을 뛰어넘는 난이도를 보였고, 가채점에서 아직 만점자 소식은 없습니다.
어려웠던 수능 시험 난이도 말고도 화제가 되었던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수능 국어 1교시 시험지를 받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문구가 있는데, 바로 수능필적 확인문구입니다. 수험생들의 필적 확인을 위해 2005년도에 도입된 이후, 매년 수험생에게 힘을 주는 문구를 선택한다고 합니다.
올해는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였습니다. 이 문구는 양광모 시인의 '가장 넒은 길'에 나오는 마지막 문장으로써 수험생들 모두 저 문구를 직접 필사하면서 한 시인의 작지만 큰 응원에 많은 감동을 하였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힘들어도 사소하지만, 단비 같은 소식에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최근 의료계는 우울한 소식만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해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보건복지부는 11월 28일 오후로 예정된 '2023년 제24차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위원장 박민수 제2차관)'에서 첩약 급여화 2차 시범사업 추진을 안건으로 상정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날 오전에 해당 안건 심의 제외를 최종적으로 결정했고, 다음 회의에서 이 안건을 다시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2020년 11월에 시작한 첩약 급여화 시범사업이 올해 말 종료되는데, 국민 건강증진에 효과가 있었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 없이 무리하게 2차 시범사업을 진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번 2차 시범사업에는 기존 대상 질환이 월경통, 안면신경마비, 뇌혈관질환후유증(65세이상) 이었는데, 요추추간판탈출증, 알레르기 비염, 기능성 소화불량을 추가했습니다.
특히 뇌혈관질환후휴증은 기존 65세 이상 환자 대상에서 전연령으로 확대했고, 대상 기관은 한의원뿐만 아니라 한방병원, 한방 진료과목을 운영 중인 병원도 포함됐습니다. 수가는 심층변증방제기술료가 3만 5500원에서 4만 5510으로 28.2% 인상됐고, 첩약 약재비도 최소 17.0%에서 최대 42.7%까지 인상했습니다.
한의사 1인당 처방 가능 횟수도 기존 1일 4건, 월 30건, 연 300건 이내 처방이 2배로 확대됐고, 환자 1인당 연간 1가지 질환으로 첩약이 최대 10일까지 처방할 수 있도록 한 부분을 2가지 질환으로 질환별 첩약 10일씩 2회까지 처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2024년도 의과의 의원급 수가가 겨우 1.6% 올라간 것에 비하면, 아무리 시범사업이라고 해도 너무 많은 혜택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의료계에서는 필수의료 대책이 시급한 상황에서 건강보험 재정만 낭비하는 포퓰리즘 정책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고 있고, 첩약을 처방하는 한의사들을 대상으로 대한한의사협회에서 진행한 투표에서도 유효투표자 1만 7068명 중 절반에 가까운 8223명(48.18%)이 첩약급여화 시범사업 전면 폐지를 주장했습니다.
2차 시범사업 시행 결정이 미뤄진 이유는 이처럼 한의계 내부에서도 크게 반기지 않는데다가 의료계 반대도 부담이 된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의약품이나 의료기술은 안정성, 유효성 검증을 통한 신의료기술 평가를 거친 뒤 경제성 평가(대체 가능성 및 비용 효과성 등)와 급여 적정성 평가(보험급여원리 및 건강보험재정상태 등)를 통해 급여화가 됩니다.
따라서 첩약급여화 시범사업이 가지고 있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첩약에 대한 안정성과 유효성 검증이 미흡합니다. 여러 차례의 이중맹검 무작위 대조군 임상시험을 시행하고, 이 임상시험들을 대상으로 메타분석 및 문헌고찰 등을 진행하는 체계적 검증이 없었습니다. 의료정책연구원이 연구보고서를 통해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을 이용해 진료하고 있으니 안정성과 유효성은 입증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둘째, 첩약에 대한 경제성 평가나 급여 적정성 평가를 다시 고려해야 합니다. 의과에서 사용하는 급여등재 의약품으로 수천 원에서 수만 원 정도의 비용으로 치료되는 질환이나 증상에 대해 첩약은 무려 수십만 원의 비용이 들어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보장성 강화 정책으로 건강보험수지가 적자로 돌아선 상황에서 첩약의 급여화는 건강보험재정을 더 악화할 뿐입니다.
셋째, 현 제도상 한약재 관리와 조제 안전성 확보는 불가능합니다. 한약재는 농수산물뿐만 아니라 동물성 재료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안면신경마비에 처방되는 견정산에는 전갈, 불환금단에는 전갈 꼬리와 백강잠(죽은 누에), 뇌혈관질환후유증에 처방되는 보양환오탕에는 지룡(지렁이), 원결통에 처방되는 온경탕에서는 아교(당나귀 가죽)가 약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식물성 한약재의 농약과 중금속 함유도 문제지만 수입 한약재에 대한 정확한 통계 및 관리도 없고 동물성 한약재에 대한 유통과 관리는 제도적으로 사각지대에 있습니다.
넷째, 한의사가 시행하는 심층변증방제기술은 새롭거나 특이한 기술이 아닙니다. 한의사는 기본적으로 사진(四診)법인 망진(望診), 문진(聞診), 문진(問診), 절진(切診)을 통해 수집된 정보를 가지고 진단을 내린 뒤 한약재를 절단 및 가감해서 처방합니다. 심층변증을 통한 진단은 현대의학의 기준으로 보면 기본 진찰에 해당하고 방제기술은 약제 처방일 뿐입니다.
결국, 한의사들은 첩약을 급여화하게 되면 진찰료와 처방료를 같이 받게 되면서 의약분업의 취지와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국민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첩약급여화 2차 시범사업은 중지돼야 하며,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좀 더 면밀하게 검증한 뒤에 시행해도 늦지 않습니다.
필자는 '가장 넒은 길'의 시 중에서 마지막 문장 뿐만 아니라 '묵묵히 빗자루를 들고 눈을 치우다 보면 새벽과 함께 길이 나타날 것이다'라는 문장도 좋아합니다. 의사들은 오늘도 국민 건강을 위해 묵묵히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이 건강해지는 날이 올 때까지 의사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첩약급여화 시범사업과 같은 작금의 사태를 보면,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대비하는 것은 의사(醫師)들 뿐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의사(義士)가 돼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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