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모 일간지에 '의료를 망치는 비급여'라는 자극적인 타이틀을 달고 시리즈로 기사가 연재되었다. 기사 중에 일본의 사례가 소개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일본은 건강보험 보장률이 높은 대신, 건보 급여·비급여 진료를 병행하는 혼합진료를 엄격히 금지한다. 안정성·유효성이 확인되지 않은 의료를 막고, 환자 부담을 줄이려는 취지다. 항암제 등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만 풀어준다. 혼합진료하면 건보가 적용되지 않고, 환자가 다 부담한다. 개원의 스기모토는 "비급여 진료 후 부작용이 생겨서 2차 치료가 필요해도 절대 건보에서 보장해 주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첫 문장에서 '혼합진료를 금지한다'고 했지만 뒤를 이은 문장에서는 '혼합진료하면 건보가 적용되지 않고 환자가 다 부담한다'며 심지어 '비급여 진료 후 부작용이 생겨도 이후 진료는 절대 건보에서 보장해 주지 않는다'고 적시했다. 혼합진료라는 것은 급여진료와 비급여 진료를 동시에 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혼합진료 금지'라는 말은 건보 진료할 때 비급여 진료를 원천적으로 못하도록 막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현재 한국의 정부 당국자도 이런 의미로 '혼합진료 금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기자가 '혼합진료 금지'의 사례라고 제시한 일본의 경우는 비급여 진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 아니다. 기사에도 나와 있듯이 일본은 혼합진료를 하는 경우를 금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혼합 진료시에는 급여 진료까지 전액 비급여 처리한다. 즉, 일본의 사례는 혼합진료 금지의 사례가 아니라 혼합진료 전액 비급여 원칙의 사례이다. 상식적으로 이것이 맞는 것이 국가는 국가의 관할 아래 있는 공보험의 적용 여부만 판단하면 된다. 아무리 국가라 하더라도 민간의 계약관계에 개입할 권한은 없다.
건강보험을 적용해 줄지 말지를 정부가 결정할 수는 있어도 민간 계약에 속하는 비급여(비보험)을 정부가 금지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공산전체주의 국가를 빼고는 사적인 계약에 속하는 비보험까지 정부가 하라 하지 마라 개입하는 나라는 없는 것으로 안다.
따라서 '혼합진료 금지'라는 용어는 애초에 성립할 수가 없는 용어이다. 그런데도 정부 당국자가 '혼합진료 금지'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의료에 대한 몰이해와 반헌법적 사고 방식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는 뭐든 한다면 하는 정부다. 그래서 '혼합진료 금지', 즉 '건보 진료할 때엔 비급여 진료를 전면 금지하겠다'고 나설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환자의 기본권, 진료받을 권리를 정부가 제한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가능할까? 헌법 정신에 입각해서 생각해보면 불가능하다고 본다. 현재 필요한 건 의과 진료내 혼합진료 금지가 아니다. 현재 필요한 것은 혼합진료 금지라는 원칙에 부합하고, 헌법 정신에 위배되지 않으면서도 재정 안정화와 의학적 필요성에 부합하는 의과와 한방의 혼합진료 금지이다.
그러면 일본처럼 혼합진료할 때엔 건보급여 인정하지 않고 전액 비급여(비보험) 처리해 환자 본인이 부담하게 하는 것이 한국에서도 가능한지 따져보자. 진료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니 기본권을 제한한다고 볼 수는 없다. 건보 적용하지 않고 전액 본인부담으로 진료받으라는 것이니 가능성은 '진료 금지'보다 높다고 본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 하려면 법조문을 바꿔야 한다. 현재 건강보험법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비급여라고 정한 것 외에는 모조리 급여를 해주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이게 가능 하려면 일본처럼 공보험 보장률이 높아야 국민적 저항이 적다.
그런데 한국의 건보 보장률은 낮은 편에 속한다. 따라서 한국의 실정에서 혼합진료를 건강보험 적용해 주지 않겠다는 것은 국민적인 저항에 부닺힐 가능성이 높으므로 실현되기 어렵다. 따라서 현재 정부는 환자가 비급여 진료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방향이 아니라 의사가 비급여 진료 처방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방향으로 정책을 만들고 있다. 결국 의사를 더욱 옥죄어 정책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뜻이다. 이러니 의사들이 반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의 의료 이용 행태가 왜곡되어 버린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핵심에는 실손보험이 있다. 일본도 사보험이 있지만 대부분 정액형 상품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실손보험 가입자를 받아서 환자가 원하는 대로 무한정 보상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일정액만 보상하고 끝나는 상품이 대부분인 것이다. 가입자의 도덕적 해이를 막을 장치를 하지 않은 보험상품은 보험이 아니라 프리패스권이다. 한국에서도 과거 상품 설계를 잘못해서 파산한 질병보험도 있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공보험과 연계하는 사보험은 상품 출시부터 철저히 금지시킨다. 공보험과 사보험을 연결하면 공보험 재정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본처럼 사보험으로 비급여 치료를 받으면 공보험 자체를 적용해 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공보험 재정을 아껴서 공보험 보장률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우리는 사보험인 실손보험을 도입하면서 공보험인 건강보험에 빨대를 꽂아 주었다. 실손보험 도입 당시 의사만이 아니라 보건복지부에서도 공보험 체계를 교란시킬 수 있다며 반대했었다. 온갖 경고와 우려를 무시하고 공보험에 기생하는 실손보험을 도입한 것은 바로 정부였다. 그렇지 않아도 누수 되는 재정이 많아 문제인 건강보험을 운영하면서도, 정부는 의학적 효과도 불분명한 한방 첩약과 같은 분야에도 건강보험 적용을 해주는 등 돈을 퍼부어 재정 손실을 야기하고 있다. 이러니 아무리 발버둥 쳐도 보장률은 오르지 않고 필수의료에 쓸 돈이 없는 것이다.
건강보험이라는 유한자원을 무한자원처럼 쓰면서 필수의료를 부도 낸 것은 결국 정부다. 그래놓고 일부 현상을 호도하며 의사 부족으로 몰고 가 필수의료를 오히려 더 악화시킬 2000명 의대정원 증원과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를 몰아 부친 것도 정부다. 치료 효율성, 삶의 질 향상 정도, 비용효과성을 따지지 않고 온갖 의료 행위를 모두 다 '공보험'이라는 그릇에 쓸어 담고, 그것도 모자라 사보험까지도 공보험에 빨대를 꽂게 방치하고서 공보험의 재정관리가 안되고 보장률이 낮다며 징징대는 것이 지금 정부가 하는 짓이다.
공보험의 보장률이란 것은 환자가 얼마나 직접 부담하느냐를 보는 것이다. 본인이 직접 부담하는 비율이 적으면 보장률은 높아진다. 그런데 본인부담금을 해소해 주는 실손보험에 전 국민의 대다수가 가입했는데 보장률은 도대체 어떻게 계산하는가? 사보험이 공보험에 빨대를 꽂았으니 공보험 보장률을 높이면 사보험이 대박 나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의료적 필요성, 비용효과성 등을 따지지 않고 근거도 불명확한 한방 첩약 같은 것에도 돈을 펑펑 쓰고 사보험에 빨대를 꽂아주었으니 공보험 재정이 감당할 턱이 없다. 그래서 한국의 의료비는 OECD에서도 유례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급증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걱정이 없다. 왜냐하면 바로 '총액계약제'라는 폭탄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터를 한방에 쓸어버리는 핵폭탄처럼 총액계약제 한방이면 의사를 영원히 노예로 잡고서 의사를 갈아 시스템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다.
현재 정부는 공정과 상식이라는 원칙은 일찌감치 내버렸고, 정부의 이러한 행태로 인해 의료에 있어 정의는 사라졌다. 이에 그 어느 때보다도 의사들의 각성과 단결이 필요한 시점이다. 평생 강제지정제라는 굴레 속에서 노예처럼 살 것이냐 아니면 의사가 전문가로서 존중받으며 환자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으냐는 이제 전적으로 우리의 손에 달렸다.
우리는 의사다. 의사는 하나이고,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