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맥학회, "원격진료 규제에 위험 고지 불가능…허용 촉구"
해외에선 이미 표준치료 권고…효과·안전성·임상적 혜택 확인
"심장질환 큰 문제 발생 전 이상신호 감지 적절한 조치 가능"
"몸 속 인공심장박동기를 달고 있는 환자는 365일 24시간 심장상태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료진이 환자 데이터를 통해 병원에서 위험 상황을 파악하고 고지하면 불법이 됩니다. 부정맥 환자의 생명을 '원격진료'의 올무에 가둬서는 안 됩니다."
국내에 인공심장박동기 삽입 시술이 도입된 지 40년이 됐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따르면 해마다 20만명 안팎의 환자가 급성 심부전증으로 응급실을 찾고 있으며, 이 가운데 6000∼7000명은 인공심장박동기 삽입 시술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공심장박동기 삽입 시술 도입 초기에는 시술을 받지 않는 환자가 많지 않았고, 대부분 시술 대상자가 고령인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상당수의 환자가 인공심장박동기에 의지에 삶을 이어가고 있다.
문제는 장비나 기술적으로는 서맥 등 위험 관리를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의사-환자간 원격진료는 불법'이라는 규제에 막혀 치명적이지만 불시에 나타날 수 있는 심장리듬의 변화를 환자에게 알려줄 수 없다는 데 있다.
원격진료와도 결이 다르다. 의료계는 원격으로 환자 상태에 대한 모니터링만이라도 허용해 달라는 요구다. 환자가 연 4회 직접 내원해 심장 상태를 체크하는 것으로는 과거 데이터를 확인할 뿐 실제 맞닥뜨릴 위험을 사전에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한부정맥학회는 8월 16일 '인공지능 시대 부정맥 환자 관리 발전방향'(심장 내 삽입장치의 원격모니터링을 중심으로)을 주제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의료법에 막혀 국내에서 시행되지 않고 있는 심장내 삽입장치를 이식한 부정맥 환자 대상 원격모니터링의 의미와 가치를 공유했다. 부정맥 환자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향적인 규제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날 간담회에는 이명용 회장(단국대병원장), 박상원 정책이사(부천세종병원 심장내과), 김성환 보험이사(서울성모병원 순환기내과), 오일영 총무이사(분당서울대병원 순환기내과), 노태호 가톨릭대 명예교수(전 부정맥연구회장·노태호심장클리닉) 등이 참석했다.
심장내 삽입장치(CIED·Cardiac Implantable Electronic Device)를 통한 원격 모니터링(부정맥 원격 모니터링)은 부정맥 감시와 치료를 위해 환자의 심장에 이식한 인공심장박동기나 이식형 심율동전환 제세동기와 같은 의료용 기기가 보내는 정보와 신호를 담당 의료인이 환자와 떨어진 곳에서 실시간으로 분석할 수 있다. 부정맥 환자에 있어 갑작스러운 심장리듬 변화는 불시에 찾아올 수 있으며 매우 치명적일 수 있다. 기존 방식으로는 환자가 정기적인 내원을 통해서만 CIED 정보를 분석할 수 있었지만, 원격 모니터링을 도입하면 내원 일정과 무관하게 의료진이 질환 관련 주요 정보를 얻고 조기에 필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CIED 이식환자는 평생 주기적으로 담당 의료진과 병원을 방문해 해당 의료기기가 감지한 심장박동 정보를 통해 의료기기 상태를 점검하고, 기기에 저장된 부정맥 관련 정보를 확인해야 한다.
CIED에는 삽입형제세동기(ICD·implantable cardioverter defibrillator), 심장재동기화 치료(CRT·cardiac resynchronization therapy), 이식형심장사건기록기(ILR·implantable loop recorder) 등이 있다.
현재 원격 모니터링이 도입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의료인-환자간 원격진료를 금지하는 의료법과 관계부처의 유권해석이다. 보건복지부는 부정맥 원격 모니터링에 대해 '환자가 내원하지 않은 상태에서 의사가 건강상태 데이터를 확인하고 의료적 상담을 제공' 하는 행위로 의료법이 규정한 의료인-환자간 원격진료에 해당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명용 회장은 먼저 부정맥 환자에 대한 원격 모니터링은 원격진료와 결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이명용 회장은 "원격 모니터링은 원격진료와 결을 달리 한다. 모니터링은 말 그대로 이식된 의료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확인하는 진료의 과정 중 하나일 뿐이며 진료행위는 모두 원내에서 이뤄진다"면서 "이미 의료현장에서는 환자 감시장치 등을 활용한 모니터링이 다수 시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정맥 환자 원격 모니터링을 통해 시간·공간의 제약을 넘어 환자의 심장상태를 관리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명용 회장은 "부정맥 원격 모니터링으로 얻는 심장박동 정보는 전화나 화상통신이 아닌 데이터 전송장치와 어플리케이션을 통해서만 전달되므로, 내원했을 때 얻는 정보와 완전히 같다. 의료의 품질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환자 편의와 문제 발생시 빠르게 조치할 수 있다"면서 "환자 데이터의 생성 위치만 병원이 아닌 '환자가 있는 곳 어디나'로 확장하면서 의료진은 시간적·공간적 제약을 넘어 원외에서 지속적으로 환자의 상태를 감시하고 조기에 적절한 임상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상원 총무이사는 '인공지능시대 부정맥 환자 관리 발전 방향' 발제를 통해 이미 세계적으로 부정맥 원격 모니터링은 CIED의 단점이 최소화되고 장점이 부각되면서 부정맥 질환 진료의 표준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부정맥 원격 모니터링의 효과와 안전성, 임상적 혜택 등은 해외에서 이미 10건 이상의 무작위대조임상(RCT)을 통해 입증됐다. 심각한 부정맥 발생을 보다 일찍 발견할 수 있으며, 부적절한 심장충격을 줄여 준다는 진단이다.
미국심장부정맥학회(HRS)는 지난 2015년 부정맥 원격 모니터링에 대한 필수 사용 권고의견을 냈으며, 서구는 물론 일본, 홍콩, 싱가포르, 대만,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부정맥 원격 모니터링이 진료 표준으로 권고되고 있다.
박상원 총무이사는 "CIED를 통한 원격 모니터링은 안전하고 유효하다. 임상적 중요한 부정맥 신호를 감지할 수 있으며 기기 관련 정보도 바로 확인할 수 있어 환자에게 적절하고 유용한 조치가 가능하다. 게다가 CIED 이식 환자의 43%는 심방세동을 동반하며, 다른 부정맥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뇌졸중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기 때문에 예방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노태호 명예교수는 부정맥 원격 모니터링 문제는 '환자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노태호 명예교수는 "부정맥학회에서는 10여년전부터 부정맥 원격 모니터링의 중요성을 알려왔다. 환자에게 임상적으로도 도움되고 의료비는 물론 병원 방문에 따른 여타 사회적 비용도 절감된다"면서 "심장질환은 큰 문제가 나타나기 전 이를 예측할 수 있는 이상신호 전조증상이 있다. 원격 모니터링이 필요한 이유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원격의료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환자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짚었다.
부정맥학회의 원격 모니터링 도입 주장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도 않다. 보건복지부는 ICT 규제 샌드박스 1호 실증특례로 '손목시계형 심전도 장치를 활용한 심장관리 서비스'를 선정해 시장진입의 길을 터줬으며, 강원 디지털 헬스케어 규제자유특구의 '건강관리 생체신호 모니터링' 실증사업을 통해 원격 모니터링의 기술적 가능성과 안전성도 검증했다. 제반 여건은 갖춰졌지만 규제가 가로막는 형국이다.
이명용 회장은 "부정맥 원격 모니터링은 부정맥 환자의 안전과 생존 기회를 넓히고, 건강 수준을 높이는 시스템"이라면서 "CIED를 통한 원격 모니터링은 우수성을 인정받아 해외에서는 이미 보편화됐으며, 우리 의료진도 임상적·기술적으로 모든 준비를 마쳤다. 하루 빨리 국내에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