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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주인 없는 바둑판
청진기 주인 없는 바둑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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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08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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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헌 원장(서울 강서·정내과의원)
정경헌 원장(서울 강서 정내과의원)

"아버지와 바둑 둘 때는 져주는 게 좋은가요? 저는 한 번도 져드린 적이 없거든요."
"그러셨어요? 아마도 그건 정 원장이 의사이기 때문일 거예요."

아버지가 엉뚱한 실수를 할 때는 다시 두시라고 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봐주거나 일부러 져 준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든 이기려 했다는 것은 아니다. 바둑은 실력대로 두는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원칙을 고수하고 싶은 마음. 그것을 의사들의 품성이라고 표현했겠지 싶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바둑을 두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릴 때에도 우리 집에는 바둑판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이 엄청나게 비싸다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비싼 것은 맞는데 그리 좋은 바둑판은 아니었다. 나왕으로 만들어진 15cm 정도 두께에 네 구석에 받침 기둥이 있는 흔한 바둑판이었다.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서서 큰돈을 물어준 대가로 받은 거라니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다.

처음에는 그 바둑판 위에 올라가서 놀았다. 혼자 앉아 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덩치가 커지자 바둑판에서 알까기를 했다. 그것도 시시하다고 느껴지자 오목을 두었다. 그러다가 아버지 눈에 띄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바둑을 배웠다. 그 후로는 주로 바둑을 두었는데 상대는 두 살 위인 형이나 동네 형들이었다. 어쩌다 이기면 우쭐해져서 아버지께 자랑을 했었다.

어느 날 드디어 9점을 접고 아버지와 처음 바둑을 두었다. 거의 다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백돌이 삼삼에 들어와서 패를 만들더니, 패는 이겼는데 다른 곳에서 손해를 많이 봐서 결국 지고 말았다. 어린 마음에 너무나 억울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그 후로는 아버지와 자주 바둑을 두게 됐다. 

세월은 빠르게 흘렀고 내 바둑 실력도 늘었다. 9점 바둑에서 한 점씩 치수가 계속 내려가더니 기어코 호선(맞바둑)으로 두게 됐다. 예과 때는 시간이 많아 바둑 동호회에 기웃거려보고 대학 축제 때에는 바둑대회에 참가했다. 아버지는 신문 기보를 보고 텔레비전 바둑 프로를 애청했지만 바둑이 더 이상 늘지 않았다. 백을 잡던 아버지가 백을 넘겨주고 흑을 잡으셨던 게 그 시절이었다. 

내 바둑 실력도 전공의 때를 정점으로 해 더 이상 기력(棋力)이 오르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가 연로해지면서 바둑이 약해졌다. 아버지가 두 점을 놓다가 결국 세 점까지 놓았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둘 때도 바둑 치수는 세 점이었다.

아버지와의 바둑하면 반드시 떠오르는 게 아버지의 콧노래다. 바둑이 유리하기만 하면 여지없이 콧노래가 나왔다. 내가 흑으로 둘 때는 젊었고 거칠게 바둑을 둘 때라 아버지의 콧노래는 여간 신경 쓰인 게 아니었다. 

어떤 때는 감정적으로 대처하다 승부를 망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흑을 잡고서 두었을 때는 콧노래가 왠지 안쓰러웠다. 즐거워하시는 것 같아 왠지 나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교직에 몸담았던 아버지께 동료 교사가 바둑 두러 오시곤 했는데, 가끔 내가 아버지 대신에  둘 때도 있었다. 옆에서 구경하시면서도 내가 유리해지면 아버지의 콧노래가 절로 나왔었다. 그 때 콧노래는 내 응원가였다. 
잊을 수 없는 추억도 있다.

어머니는 화가 많이 났다.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게다. 초등학교 선생님인 어머니가 구정 전날 당직 근무 마치고 집에 왔더니 그때까지 심부름을 안 한 막내. 더구나 이놈이 의과대학 고학년이랍시고 건방을 떠는 것인지, 어미 말을 듣는 태도가 영 아니었다. '선물 좀 늦게 갖다 주는 게 뭐 그리 잘못이냐'라고 말하는 것 같아 여간 거슬린 게 아니다. 급기야 어머니는 큰소리로 감정을 폭발했고 나는 나대로 언짢아졌다. 

"심부름이나 다녀올게요." 
나는 명절 전 인사 선물을 들고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왔다.
사실 나도 억울한 면이 있다. 선물을 들고 심부름을 가려는 순간에 아버지가 바둑 한 판 두자고 해서 그런 것이다. 바둑이 어디 한 판으로 끝나는가. 한 판이 두 판 되고, 두 판이 세 판 되면서 계속 두다보니 어머니 오실 때가 된 것이다. 

아버지는 외출하시고 나는 피곤해서 잠시 누웠는데 그 때 어머니가 들어오셨던 것이다. 뭐하느라 심부름도 안 하고 눈은 벌겋게 해서 누워있냐고 다그치는데 남자가 의리가 있지. 아버지랑 바둑 두느라 그랬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사태를 파악한 아버지가 나를 밖으로 불러내셨다. 허름한 술집이었다. 꼴뚜기 데친 것에 소주 한 잔, 한 병을 나눠 마셨다. 꼴뚜기가 감칠맛나게 착착 감겼고, 초고추장 찍어 한 입에 통째로 들어가는 느낌도 참 좋았다. 마음 상하지 말라고 자리를 마련하신 거지만 특별한 얘기는 없었다. 

이제 며칠 있으면 아버지 6번째 기일이다. 그동안 뭐가 그리 바쁜지 그리움도 아쉬움도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도 어버이날이나 생신 그리고 기일, 당신이 좋아했던 음식을 먹거나 바둑 얘기만 나오면 사무칠 때가 있다. 진료 중에도 그런 적이 있다. 목소리가 아버지와 비슷하거나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뵌 모습과 비슷한 어르신을 볼 때면 잠시 숙연해진다.

내 나이 쉰에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죽음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 아닌 것 같다. 부모의 죽음은 온전한 내 편 하나를 잃는 것이니….

얼마 전 고향 집에 갔을 때 아버지가 누워 계셨던 자리 윗목에 바둑판이 보였다. 아버지와의 많은 추억을 안고 있는 바둑판이 주인을 잃고 덩그러니 있는 게 쓸쓸해 보였다. 혹시나 해서 대학생인 아들 녀석에게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혀 관심이 없다. 살짝 서운하다. 핑계 삼아 우리 집에 갖다 놓고, 바둑을 가르치고 가끔 술도 함께 마시면 좀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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