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식 인천병무지청 공보의(병역판정검사 전담의사)
- 제20회 보령의사수필문학상 대상 수상작
월요일 아침, 나는 두 자매를 옆에 두고 어려운 말을 꺼내려 하고 있었다. 여든두 살 할머니의 딸들이었다. 폐암 말기인 환자는 두 종류의 항암제를 써본 터, 저번 주부터 기운이 없더니 며칠 사이 혈액검사가 제멋대로 오르내렸다. 이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했다. 남겨질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가슴 아픈 말을 해야만 했다.
모니터에 차트를 띄우니 암호처럼 빼곡히 의학 용어가 적혀 있었다. 나는 삼 년 전의 사진에서부터 설명했다.
우측 폐 상엽에서 시작된 종양은 가슴의 뼈를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처음에는 표적 항암제를 사용할 수 있는 유전자 변이가 발견되어 일 년 반이나 먹는 약으로 버텼다. 하지만 이내 경과는 나빠졌고, 몇 번의 폐렴이 지나갔다. 우리는 세포독성 항암제로 계획을 변경했고 총 다섯 번의 입원 치료가 이어졌다. 그 마지막이 지난 달이었다. 다시 찍은 사진에서 복막에 새로운 전이가 발견되었다. 더 이상 무리한 치료를 권유하지 말아야 했다. 곧 임종이 찾아올 것이 자명해 보였다. 눈앞에서 슬픈 미래가 아른거렸다.
창밖으로 5월의 햇살이 환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지난주에 전화로 언질을 주었지만, 직접 마주한 두 딸의 얼굴에는 눈물이 열매처럼 맺혀 있었다. 황망한 마음에 나는 입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애꿎은 검사 창들을 뒤적이면서 무거운 숨을 참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확인하지 않은 검사 결과를 마주쳤다. 조직검사는 다시 할 수 없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처방한 혈액검사였다. 결과 보고 시각은 오늘 아침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자리에 얼어붙어 나는 몇 분 동안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T790M 유전자 돌연변이 양성. 누군가가 지나치면서 나를 보았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침울한 표정에서 기쁨이 솟아나더니 곧 전화를 걸고 소리치는 모습을 발견했을 테니까.
나는 약국에 전화해 표적 항암제 타그리소의 재고를 확인하고 두 딸의 손을 맞잡고 마침내 말을 꺼냈다. 속아보는 셈 나를 믿어보라. 어머니 상황은 좋지 않으나 아직 포기할 상황은 아니다. 어쩌면 조금 더 시간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자매의 눈에 맺힌 눈물이 이내 쏟아져 내렸다.
미열과 요동치던 염증 수치가 이내 잦아들고 환자는 일주일 뒤 퇴원했다. 휠체어에 앉아 멀어지는 거구의 할머니를 바라보며 오래전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달처럼 둥그런 얼굴과 무 같은 다리를 가진 사람은 우리 외할머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잠옷을 입은 나는 아이가 되어 발코니에 매달려 있다. 먼 골목을 바라보며 할머니를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 거인 같은 몸에 뒤뚱뒤뚱한 걸음. 백 걸음도 넘는 거리에서 나는 딸기를 사 오라며 힘껏 소리친다. 할머니는 귀에 마술이라도 부린 걸까? 그 소리를 알아채고는 슈퍼로 방향을 바꾼다. 아무리 팔을 크게 벌려도 다 안을 수 없던 품. 코끼리 같던 무릎 안에서 나는 정말 행복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수백 개 갖고 있다고 떠벌려 자랑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추억하는 이야기는 이것 하나뿐이다. 시간은 나에게 더 많은 기억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할머니는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기침 증세로 동네에서 엑스선 촬영을 하고 곧 대학 병원에서 폐암 4기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두 번 정도 항암치료를 받고는 혼수상태에 빠져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이십 년도 더 된 이야기다.
기억나지 않는 어린 날의 일이므로 어머니의 말씀을 통해 상상력의 바퀴를 돌린다. 폐암의 뇌전이, 뇌부종과 혼수와 같은 끔찍한 단어들이 떠오른다. 당시 여섯 살이던 나는 병원에서 잠든 할머니를 안아보았다는데, 이 역시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다. 시간의 역사는 이토록 잔인하다.
나는 소년일 때부터 세상 모든 일에 호기심을 품었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비행기 조종사를 꿈꿨다. 빛과 물질의 비밀을 풀기 위해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다. 삶과 죽음의 이유를 알고 싶어 의사가 되었다.
물론 의사가 된다고 그런 거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의 잔인한 진실만을 알게 되었다. 살아있는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 통계청에서 발표한 사망 원인을 펼쳐놓고 보면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는 끝이 없어 보인다.
불멸과 영생은 없다. 물리학은 이를 엔트로피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늙고 병들어가는 것은 우주의 구성 원리다. 가만히 놔두면 우리 우주가 차갑게 식어가는 것처럼. 애초에 삶이 죽음으로 향하는 것은 우리가 태어난 이 우주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실로 우리가 이렇게 죽는 것은 당연한가? 아름다운 우리 삶이 끝나고 죽음이 다가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한없이 무기력해지던 어느 날, 나는 하늘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1964년 펜지어스와 윌슨은 우주 안테나의 잡음을 없애기 위해 열심히 먼지를 쓸고 닦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깨끗이 안테나를 닦아도 사라지지 않는 잡음이 있었다. 안테나 접시를 이리저리 돌려보니 이는 우주 모든 방향에서 들려오는 2.7K의 주파수로 밝혀진다. 물리학자들은 이것이 빅뱅 탄생의 메아리라는 것을 밝혀냈고 우주배경복사라고 부르기로 했다. 우주 탄생의 순간은 빛으로서 기록되어 모든 공간을 맴돌고 있다.
그 이후로 우리를 거쳐 간 모든 빛은 창공을 떠돌면서 관측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누구든지 높은 하늘을 바라보고 무언가 알아내려 한다면 우주라는 공간이 빛으로 쓰인 시간의 도서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이 사실이 나를 위로했다. 내가 잊었으나 나를 지나간 모든 것들이 그 위에 있다는 것이. 신이 되어 모든 순간의 빛을 바라볼 수 있다면 알게 될 사랑의 순간들. 그것들이 읽히기를 바라면서 우주 공간을 맴돌고 있다는 사실.
여든두 살 할머니의 두 딸을 앉혀놓고 폐암 T790M 유전자 돌연변이의 임상적 의의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그날 아침에 나는 보호자로부터 멋진 말을 들었다.
우리 어머니가 착하게 사셔서 하늘에서 이런 복을 내려주신다는 말.
어떤 의사가 더 아름다운 말로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그날부터 조금 다른 사람이 되기로 했다. 인간은 왜 죽어야만 하느냐고 신을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더 좋은 질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할머니가 평생 착하게 살아서 두 번째 표적 항암제를 허락받는 일이 가능한가? 할머니의 사랑으로 내가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이 가능한가?
이 두 질문에 모두 가능하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당신은 더 멋진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들을. 그리고 우리 우주가 원래 아름다운 곳이라 대답할 수도 있으리라. 그것들은 모두 빛으로 하늘의 시간에 기록될 것이다. 먼 훗날 누군가에게 읽힐 것을 기다리면서. 이건 우주배경복사가 알려주는 시간의 역사다.
어린 날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영원한 삶은 한낱 꿈이 되고, 우리는 모두 늙어 죽겠지만, 우리가 보낸 사랑의 순간들은 영원할 것이다.
별이 생기고 죽는 것이 시간의 역사라면, 우리가 만나서 보낸 시간은 사랑의 역사이니까. 매일 환자를 보러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즐겁다. 그건 우리 할머니를 다시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